진영의 논리로 보이지 않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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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의 논리로 보이지 않는 주님
  • 김종생 목사
  • 승인 2018.12.26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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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생 목사/글로벌 디아코니아센터 상임이사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이상한 나라에서 탈출하려 애쓰는 앨리스가 체셔 고양이를 만나 묻는다. “실례지만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니?” 고양이가 대답한다. “그건 네 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달려 있어!” “나는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어.” “목적지가 없다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어.”   

얼마 전 한 신문에 영국의 한 청년이 ‘한국 정치는 이상하다’고 묘사를 했다. 진정한 의미의 진보도 보수도 아니면서 기이하게 좌우 진영 논리가 모든 정치적 아젠다를 집어삼켜 합리적인 중도가 설 자리가 없는 나라라는 의미였다. 우리나라가 진영논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정치는 말할 것 없고 사회문화 영역에서 진영논리는 모든 논리를 압도하는데 이 진영논리의 병폐는 기독교계에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진영논리는 ‘그 대상이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가’를 다른 것보다 우선시하여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진영에 속한 이념과 성향에 따라 타인의 입장이나 해석을 무조건 배척하고 폄하하는 일을 한다. 

상담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자기성찰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흑백논리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실제로 자기성찰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자신보다는 타인에 대해서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개인적인 것이 집단화되어 상대를 재단해 버리는 경우이다. 진영논리의 늪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의견과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상대를 적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의견이 다른 공동체의 일원일 뿐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성경의 진리에 본질적으로 다가서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준에 위배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틀린 것’과 ‘바른 것’은 결코 계량적 수치에 의해서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전에는 한국교회가 WCC 문제로 갈등과 분쟁에 휩싸여 있더니 최근에는 한 대형교회를 두고 찬반이 나뉘어 그 갈등의 정도가 도를 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다툼과 갈등의 현장에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경청하려 하기보다 주님이 자기편인냥  독점하여 어느새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본다.  

얼마 전 성지순례중 2km 정도 되는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걸으며 주님께 기도를 드렸다. 14처소를 도는 동안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진 3, 7, 9지점을 지나는데도 말씀이 들려오지 않아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다만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문득 떠오르나 그냥 지나쳤다.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곳과 예수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던 곳을 지나는데 또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뇌리를 스치지만 주님께 더 멋진 말씀, 임팩트 있는 말씀을 주문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주님이 호통을 치셨다. “왜 나보다 앞서가느냐?”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뒤를 따르려 하기보다 나만의 주님으로 포장하고 선점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주님은 오늘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씀만을 들으려고 더 근사한 말씀을 찾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주님을 따르기보다 주님 보다 앞서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보다, 우리 주장보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주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가 그리운 성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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