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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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회심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10.30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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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칼뱅과 프랑스의 종교개혁(2)
▲ 황의봉 목사.

칼뱅의 생애에 있어서 회심의 중대한 전환점이 정확하게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시편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갑자기 회심시키셔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시고 보다 교훈하기에 쉽도록 인도하셨다. 당시 나는 어렸을 때보다 심정이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 이처럼 진정한 신적 경건의 맛과 지식을 약간 음미하게 되자, 나는 즉시 이 방면에 보다 큰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갈망에 불타게 되었다.”

칼뱅은 1533년 11월 1일 그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이 마튀렝교회에서 파리 대학교 총장 취임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뱅이 초안하였습니다. 칼뱅은 이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세상과 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는 자들을 이단, 미혹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들입니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왕실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칼뱅과 콥은 당국의 소환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환에 응하면 처형될 것을 짐작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뱅은 경찰들이 갑작스럽게 그의 집을 포위하자 침대보를 꼬아서 옆 빌딩으로 도망한 후 농부처럼 괭이를 걸치고 파리를 빠져 나와 바젤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칼뱅은 샤를레 에스쁘리라는 가명을 쓰고 남부 프랑스에 잠적하며 살았습니다.

프랑스 내에서는 날로 긴장이 고조되어 가는 상태였던 차에 마침 발생한 ‘벽보들 사건’으로 드디어 문제는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1534년 10월 18일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제 아래서 실시되는 미사의 잘못된 사용에 관한 조문’으로 시작되는 벽보들을 파리 및 기타 다른 도시들에 붙였습니다. 그중 하나는 암보아즈에 있는 왕궁 안 왕의 침실 문 앞에까지 붙어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인쇄물을 집 앞에 두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거리에도 두어 사람들이 읽게 했습니다.

벽보들이 거리마다 붙여있고, 곳곳마다 배포되자 파리 시내는 온통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의회를 소집하고 다음과 같은 결정을 했습니다. “누구든 벽보들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나 그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주면 100크라운을 받을 것이고 그런 자들을 숨기는 자들은 화형에 처해질 것이니라.”

그해 ‘벽보들’과 관련 있는 사람들 7명을 옥에서 꺼내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그 후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하였으며, 칼뱅의 친형제 중 하나를 처형하였습니다.

이 때 칼뱅은 막 개종했을 때였는데 자기와 같은 신앙으로 죽임 당하는 것을 보고 젊은 신앙인으로서 오열했습니다. 더구나 칼뱅이 왕립학교에 입학하여 파리에 살고 있을 때 머물러 있었던 에띠엔느 드 라 포르쥬가 화형을 당하여 죽어 칼뱅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칼뱅은 그의 사촌 로베르 올리베땅이 번역한 성경의 서문을 썼습니다. 올리베땅의 성경은 1년 뒤인 1535년 뇌샤텔에서 인쇄되어 출판되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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