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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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된 교회
  • 백소영 교수
  • 승인 2018.06.2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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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 교수/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이웃의 친구’가 되어야 할까? 언젠가 한 포럼에서는 사회학자 엄기호 박사가 청중에게 물었다. “교회는 왜 오늘날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지 않나요?” 하루에 740만원을 구매할 정도의 고객이라서 불법주정차 지역에 차를 대는 것이 가하다는 어느 모녀의 지하주차장 갑질 사건에서, 무릎을 꿇고 연신 사죄하던 알바생을 ‘패기 없는 젊은이’로 몰아세운 어느 지성인을 향하여 그는 맹렬히 비난했다.

그 사건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입해 볼 때, 알바생은 강도 맞고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그 사람보고 어찌 일어나 정신 차리고 싸우라고 조언하고 있느냐는 말이었다. 거기서 필요한 것은 지나가던 다른 고객의 분노였다. 도대체 뭐하는 거냐고? 잘못은 누가 했는데 무슨 짓이냐고? 그 권력관계의 구도에서 자유롭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알바생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지나가던 다른 고객’ 뿐이라는 지적이었다.

정말 공감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엉뚱한 데에 에너지와 인력을 쏟으며 분노하지 말고, ‘정의로운 분노’로 개입해야하는 부분을 알려주는 지적이기도 하다. 분노도 사랑의 동기로 이루어지면 정의롭다.

일찍이 여성주의 사회윤리학자인 비벌리 해리슨(Beverly Harrison)은 ‘사랑의 행위로서의 분노’를 기독교적 덕목으로 주장한바 있다.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는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품는 사랑이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이라고 전해왔지만, 여성의 경험에서 재고할 때 예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희생이 아니었음을 밝힌 글이다.

예수는 스스로 제물이 되어 인류를 위한 속죄제의에 바쳐지기 위한 운명이었기에 희생한 것이 아니라, 당시 형식적 율법주의 아래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자유를 빼앗겼던 민초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결과적인 희생을 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정의로운 분노’는 세상을,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관계적 질서로 바꾸기 위한 사랑의 행위이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꼭 가져야하는 윤리적 덕목이라는 거다.

‘정의로운 분노’가 기독교의 덕목이라면, 오늘날 인력 재력 공간 다 가진 한국교회가 어떤 방식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일 수 있을까? 도대체 오늘날 ‘강도 맞고 피 흘리는 이들’은 누구일까? 이들을 들쳐 업고 들어와야 하는 교회는, 아니 이들이 생존을 위해 뛰어 들어오고 싶은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아니, 교회가 선교적 사명으로 경계를 넘어 뛰어나가야 하는 현장은 어디일까? “무사히 할머니가 되는” 소박한 그러나 절절한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게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을까?

한 마리 어린 양도 잃어버림이 없는 나라, 온 집을 다 쓸고 닦으며 한 드라크마를 기어이 찾아내는 나라, 이런 하나님 나라의 관계 방식을 고백하는 교회가, 쓰고 버리고 효용가치가 없어 버리며 때론 그냥도 버리는 이 ‘반(反)하나님적 시스템’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사회적 성으로서의 젠더는 타락 이후의 질서였던 가부장제와 함께 보내 버리고, 서로 마주보고 서로를 돕는(에제르) 짝-공동체로 살아가는 가능성과 힘을 세상에 전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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