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 추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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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 추진된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8.06.11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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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학의 뿌리 츠빙글리가 1519년 시작
오는 6월 28일 준비위 구성 ... 학술연구 중점8
▲ 스위스 취리히에 세워진 츠빙글리기념교회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츠빙글리 동상은 신앙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경과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칼을 가슴에 품고 있다. 사진제공= 주도홍 교수

독일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2017년 한국교회 안에서는 다양하고 성대한 기념사업들이 추진됐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스위스 츠빙글리(1484~1531)가 루터와 다른 차원에서 일으켰던 1519년 교회개혁 운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을 시작한 후 1531년 전쟁터에서 갑자기 생을 마감하면서 스스로 신학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불링거가 그 신학을 계승하고,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저술하는 데 영향을 주어 개혁주의 신학이 완성되도록 만든 인물이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앙과 전통을 따르고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츠빙글리는 마치 잊혀진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런 안타까움에서 국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뜻을 모아 내년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기념사업 준비에 착수할 계획이어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백석대, 장신대, 총신대, 고신대, 안양대, 합신대 등 주요 신학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오는 6월 28일 첫 모임을 갖는다.

준비위가 꾸려지면 곧바로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예정이며, 내년 5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해온 스위스 개혁교회와 연대 기념사업 방안도 추진하게 된다. 북미와 네덜란드 등 교회와도 협력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츠빙글리가 1519년 1월 1일 스위스 취리히 그로스뮌스터교회에서 종교개혁과 복음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던 날을 기념해, 우선해서 한국교회 차원으로 내년 1월 1일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예배를 거행한다.

작년에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기념행사 위주가 많았다면, 츠빙글리 종교개혁 기념사업은 츠빙글리에 대한 전문 학술연구를 지원하고 관련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내실있는 기하는 방향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학술대회는 츠빙글리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 누구보다 장로교회가 츠빙글리를 더 깊이 이해하며 뿌리를 확인하고 종교개혁 기본정신을 따라 다시 부흥할 수 있는 신앙적 토대를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 백석대 부총장 주도홍 교수가 지난 8일 본지와 만나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교회 기념사업을 한국교회에 제안하며, "츠빙글리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책무"라고 강조했다.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을 처음 제안한 백석대 부총장 주도홍 교수는 지난 8일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츠빙글리는 루터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불링거와 칼빈에 의해 완성돼 개혁주의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북미, 19세기 한반도에까지 상륙할 수 있었다”면서 “츠빙글리의 신학이 21세기 한국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뿌리를 같이 하는 교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념사업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 책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주 교수는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예배당 안에 갇혀있는 한계가 있다. 기도와 헌금, 봉사만 잘하면 좋은 신앙인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츠빙글리는 사회 참여적이고 교회 가치관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던 종교개혁가”라며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를 이해하면서 츠빙글리가 보여준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신학의 원형이라고 평가되는 ‘67조 신앙고백’을 1523년 발표하면서, 34~43조까지 10개 조항이나 교회와 사회적 관계에 대해 밝힌 바 있다.

한편, 루터와 츠빙글리는 교회개혁이라는 지향점은 같았지만, 결국에는 하나가 될 수 없는 길을 갔다. 특히 1529년 마브룩 종교회의에서 ‘성찬’을 두고 츠빙글리의 영적임재설과 루터의 공재설 간 입장 차이로 인해 사실상 관계를 단절했다. 또 1563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공포될 때, 루터교에서는 교리문답을 이단시 할 정도로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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