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의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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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의 반박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5.3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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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루터와 독일의 종교개혁(4)

‘95개조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성곽 교회 앞에 게시하였지만 처음에 로마 교황청은 루터와 논의하기보다는 힘으로 누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95개조의 항의문이 소개되자, 로마 교황청이 면죄증라는 이름으로 독일 교회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독일인들 가운데 루터의 항의문에 동조하며 로마 교황청을 반대하는 운동도 점점 확산되어 갔습니다.  

루터의 95개 논제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반응은 당시 면죄증 설교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테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테첼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있는 빔피나의 도움으로 루터의 95개 논제를 반박하는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루터는 이에 대하여 면죄증 문제에 대해 학문적으로 다룬 글인 ‘면죄증의 효능에 대한 논쟁의 해결’을 발표하였으며 계속해서 평신도들을 위해 ‘면죄증과 은총에 관한 설교’를 통해 면죄증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 교황청은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학자 프리에리아스를 통해 ‘교황권에 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교황이 교황의 자격으로 결정할 때는 오류가 없다. 그의 교리는 무오한 신앙의 통치이며, 성서의 힘과 권위도 거기에서 나온다”고 반박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루터의 편에 서는 사람과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로 구분되어 논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1518년 초에는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니칸 수도회가 루터를 로마에 정식으로 고소하였습니다.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루터는 이에 불응하였습니다. 이 일을 조정하기 위하여 색소니의 선제후 프레더릭이 나서게 되었고, 교황은 추기경인 카예탄을 시켜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카예탄과 로마 교회는 루터를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이를 감지한 프레더릭이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로부터 피신시킴으로써 저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루터의 개혁 운동이 교회 당국에 의하여 쉽게 제어될 수 있는 성격이었음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1519년 초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맥시밀리안이 사망하자, 유럽 여러 나라는 루터보다는 맥시밀리안의 후계자를 선택하는데 더 신경을 썼습니다.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스페인의 카를 5세가 신성로마 황제의 자리를 놓고 대결하다가 카를 5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카를 5세는 프랑스의 프랑소와 1세와 장기적인 전쟁에 돌입하여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동방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터키제국의 황제 술레이만 1세는 유럽을 상대로 정치를 하면서 카를 5세가 눈의 가시처럼 여기던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서 원조를 약속하기까지 했는데, 이는 적의 적인 종교개혁자들을 지원함으로써 유럽의 분열을 유도해내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루터의 신학의 중심은 십자가 신학입니다. 그가 불과 1년 6개월 만에 그의 불변의 십자가 신학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의 신학을 정립할 수 있었을까? 1년 6개월 만에 뭔가의 신학을 정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루터에게서 위대한 일이라고 봅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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