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불링어(15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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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츠빙글리 그리고 불링어(1538년)
  • 주도홍 교수
  • 승인 2018.04.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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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팩트 종교개혁사 ㉗

1529년 10월 4일 루터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일 마부르크 종교담화를 “친절한 담화”로 평하며 소식을 전했는데, 취리히의 츠빙글리와 바젤의 외콜람파드와는 그냥 좋은 관계로 평화롭게 지낼 수는 있으나, “서로 형제와 그리스도의 지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제시했다. 성찬 빵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함께 한다는 공재설을 펼친 루터는 영적으로 임재 한다(Christus als geistlich darinnen gegenwaertig bekennen)는 츠빙글리의 영적 임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담화 후 루터는 고별 악수를 위해 내민 츠빙글리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당신은 나와는 다른 영을 가지고 있소”라는 정죄의 말을 했다. 그로부터 루터와 츠빙글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는데,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관계는 서먹서먹하기까지 하다. 실제로 루터가 츠빙글리를 끝까지 그렇게 생각하며 대했는지 궁금하다.  

약 10년 후 루터가 1538년 5월 14일 츠빙글리의 후계자 불링어(H. Bullinger)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불링어가 성경의 권위와 감독의 직분에 관해 쓴 자신의 저서를 루터에게 보내며 서평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여러 가지 바쁜 일로 인해 그 책을 다 읽지 못한 상태로 이 편지를 보내야 했지만, 시간을 내어 그 책을 다 읽기를 원했다.

루터는 편지에서 불링어를 “취리히 교회의 신실하고 사려 깊은 종”으로 일컬으며, “주님 안에서 높은 존경으로 사랑하는 친구”라 불렀다. 분명 루터는 그 역사적 ‘마부르크 종교담화’에서의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드를 잊지 않았다. 당시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드는 7년 전 1531년 이미 고인이 된 상태였다. 루터는 편지에서 두 사람을 터놓고 아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마부르크에서 츠빙글리를 만나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그를 그리고 외콜람파드도 매우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 그러나 우리는 지성과 감성에서 전혀 하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확신에서 멀어졌고, 우리에게는 낯선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신학사상과 일치를 볼 수 없는 현실이 여전히 불쾌한 일(Aergernis)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츠빙글리의 종군목사로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루터 자신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음을 숨기지 않으면서, 그의 교리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인간적으로 존경을 표한다. 그렇다고 루터는 불링어를 포함한 취리히 종교개혁자들의 사상 전반에 좋다고 동의할 수는 없다고 밝히는데, 진실하지 못함은 자신들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 역시 불링어가 그러한 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한다. 거기다 루터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로 묶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이 다하기 까지 이 이상 더 좋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도 예측한다. 그러면서 루터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쓴다. 

“이것을 우선 나의 생각으로 받아주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당신의 책을 끝 까지 읽을 것이요. 진정 행복하게(recht wohl) 사시구려! 비텐베르크에서 1538년 5월 14일. 마르티누스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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