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종교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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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종교재판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3.2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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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99. 종교재판(4)

프랑스나 독일보다는 후기에 종교재판이 시작되지만 가장 맹위를 떨친 나라는 에스파냐 곧 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이슬람교도를 추방하고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을 처벌할 특별제도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황 식스투스 4세는 1478년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허가하였습니다. 이로써 이단 심문인 종교재판이 스페인에서 보다 조직적으로 제도화되었습니다.

1481년 초 세비야에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는데, 그 해에 298명이 산채로 화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1483년 스페인 정부는 교황을 설득하여 카스타야의 종교재판소장 지명권을 얻어내고, 같은 해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의 종교재판소 지명권을 획득했습니다. 교황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심문관 임명권을 국왕이 장악하게 되자 종교 재판소는 완전히 왕국 통치기구의 일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종교재판이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용되게 한 요인이 됩니다.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활동한 종교재판관들은 너무나도 가혹하여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토르크마다의 토마스는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종교재판소장으로 임명되었는데, 도미니크파 수도사였던 그는 임종시까지 18년간 종교재판소장으로 있으면서 97,322명의 재산을 몰수 하거나 투옥시켰고, 10,222명을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391년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학살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고, 카스티야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습니다. 이런 위협에 직면한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콘베르소스’ 곧 ‘개종한 유대인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가운데 형식적으로는 가톨릭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유대교도로 남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콘베르소스들에 대해서 탄압을 시작했고, 이들을 위장 개종자라 하여 대대적인 이단 심문을 시작하여 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부유했으므로 이들이 누리는 권력이나 부에 대한 증오심이 게재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재산을 탐한 것이 종교재판의 숨은 동기였다는 주장이 전혀 사실무근은 아닙니다.

스페인에서의 종교재판은 유대인이나 콘베르소스뿐만이 아니라 나중에는 풍기사범 일반에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지배기에 한때 중단되었으나 정식 폐지된 것은 1834년이었습니다.

이때까지 스페인에서 종교재판이란 이름으로 희생된 수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존 폭스에 의하면 산채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한 자가 31,912명, 토굴 속에 투옥된 사람이 291,45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토르크마다의 토마스가 종교재판장으로 있는 15년 동안 화형을 당한 유대인들만 8만 명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16세기의 종교 재판소는 개신교도들을 처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는데, 교황 파울로스 3세는 1542년 로마에 종교재판소를 설치했습니다. 이 기관은 완전히 독립적인 기구로서 주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이 이후 유럽, 특히 스페인 프랑스에서 자행된 종교재판은 이 전 시대보다 덜하지 않았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광란과 살인은 중세의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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