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 복음화 위해 세워진 극동방송, 기적과 간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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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 복음화 위해 세워진 극동방송, 기적과 간증의 역사”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8.02.07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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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巨木을 만나다... ‘성실한 복음전도자’ 김장환 목사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 이 말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가 확신하는 삶의 지론이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숱한 기적을 체험하고, 힘들고 어려운 처지를 참지 못하고 사람을 찾아다닌 그의 깨달음을 함축한 말이기도 하다. 여든이 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활력이 넘치는 김장환 목사는 지금도 24시간, 365일이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생활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아낌없이 ‘복음전파’에 사용하고 가겠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 그리고 한국사회의 발전과 굳건한 한미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온 한국교회의 거목(巨木) 김장환 목사를 만나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 극동방송을 이단으로부터 다시 찾아내고, 40년 넘게 방송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김장환 목사는 "극동방송의 역사는 곧 기적의 역사"라고 간증한다.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전 세계는 설교보다 통역에 더 주목했다. “설교와 통역이 완벽히 일치한 집회였다”는 평은 김장환 목사를 순식간에 ‘스타’로 만들었다. 

1959년 자신의 고향인 수원에 12명의 성도와 함께 중앙침례교회를 개척하여 출석 성도 1만5천여 명의 대형교회로 성장시켰고,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한국십대선교회(YFC)’를 조직하고 직업소년학교, 중앙유치원, 수원중앙초등학교, 한국평신도신학교 등을 세워 교육선교에 매진해온 김장환 목사. 

그러나 그를 대표하는 호칭은 ‘극동방송 이사장’이다. 1977년 극동방송 사장으로 부임 후 공산권 복음화를 위한 북방선교 방송과 한국교회 성도들을 위한 복음방송의 두 가지 사역을 온전히 감당해왔으며, 전국에 12개의 FM라디오 방송국과 2개의 AM라디오, 9개의 중계소를 세웠다. 극동방송 김장환 목사의 사역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극동방송을 통해 방송선교에 매진하신지 40년이 넘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간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방송이 중국과 러시아, 북한까지 송출이 됩니다. 공산권 복음화를 목적으로 설립됐으니까요. 중국의 한 지하교회에서는 20년 동안 우리 방송을 들으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20년 동안 모은 2만 1천 달러의 헌금을 가지고 방송국을 찾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극동방송을 듣고 탈북을 결심해 남한까지 오게 되었다는 분도 있었죠. 낙심한 영혼이 힘을 얻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희망을 얻게 되는 방송이 바로 극동방송입니다. 지나온 방송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적의 역사’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극동방송의 모체는 미국의 팀선교회((The Evangelical Alliance Mission)가 한국에 와서 처음 시작한 국제복음방송이다. 팀선교회가 방송국을 세운 목적 자체가 공산권 복음화였다. 그러나 운영과정에서 재정난에 빠졌고 팀선교회는 구원파와 공동운영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과정에서 분쟁이 생기면서 극동방송은 김장환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 목사는 1971년 무선국 허가를 받고 1973년 재단법인을 설립해 제주에서 ‘아세아방송’을 시작하던 중이었다. 김장환 목사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팀선교회는 다시 극동방송의 단독운영권을 갖게 되었다. 이후 김장환 목사는 극동방송을 인수하여 아세아방송과 함께 북방선교를 위한 복음방송의 사명을 감당해왔다. 극동방송과 아세아방송은 2001년 완전히 하나로 통합됐다.

- 방송을 더 키우실 생각은 없으셨나요?

“예전에 ‘종합편성권’을 운영할 기회가 생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부했습니다. 순수복음방송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모든 방송국이 한국방송광고공사(kobaco)에서 광고를 받아 운영하지만 우린 다른 종교방송을 고려해 최소한의 광고만 받습니다. 지사에서는 아예 광고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극동방송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기적이고 간증이죠.”

▲ 1973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닷새 동안 연인원 325만 명이 동원됐다. 김장환 목사는 정확한 통역으로 군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다. (Photo courtesy of Billy Graham Evangelistic Association. Used with permission. All rights reserved.)

- 극동방송과 함께 목사님을 따라다니는 또 하나의 수식어는 1973년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입니다. 한국교회사는 물론이고, 한국 현대사에 전무후무한 대형집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전도집회가 가능했을까요?

“1960년대 중반부터 한경직 목사님과 김활란 여사 등 여러 신앙선배들이 ‘3천만에게 복음을 전하자’며 전도운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미국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을 강사로 초빙하자고 제안했죠. 정부가 대형집회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상황이라 박정희 대통령의 허락을 받은 후에 집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재단에서 집회 일주일 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재단에 속한 부흥사들이 여럿이 함께 오셨죠. 그래서 그 분들이 부산과 대전, 전주, 광주, 춘천에서 닷새 동안 먼저 집회를 열고 기도의 불을 지폈습니다. 수원과 인천에서는 하루만 집회를 열었지만 수만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기도의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전국 집회 후에 1973년 6월 3일 여의도광장에서 ‘5천 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본격적인 전도집회가 열렸습니다. 5월 30일부터 닷새 간 치러진 대회에 모인 사람들은 연인원만 325만 명이고 결신자가 8만 명에 이릅니다. 이 대회 이후에 김준곤 목사가 빌 브라이트 목사를 초청, ‘엑스플로 74’를 열었고, 1980년에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열렸죠.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이후에 한국 기독교는 가파른 성장을 했고 대형교회도 등장하게 됐습니다.”

방송 듣고 탈북 결심했다는 간증은 북방선교 결실 
중국 지하교회에서 20년간 헌금 모아 찾아오기도 
수백만명 모인 빌리 그레이엄 전도집회 잊을 수 없어

전도집회를 이끈 빌리 그레이엄 목사조차 이날을 잊지 못한다. 그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크고 역사적인 전도의 날이며, 한국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감격을 쏟아냈다. 

그런데 교회사는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에서 열린 본 대회만 기억한다. 매일 50만 명이 넘는 인파가 여의도에 몰릴 수 있었던 뒷이야기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김장환 목사는 본 대회 일주일 전, 전국 7개 도시에서 진행된 사전집회가 군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통역을 맡게 된 김장환 목사가 남긴 조언도 성공적인 집회에 한몫했다. 김 목사는 집회를 앞둔 빌리 그레이엄 목사에게 “진짜 한국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회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고스란히 성도들에게 전해졌다. 

- 당시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한국교회에 주신 메시지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복음의 핵심가치인 ‘오직 예수’만을 강조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만 되찾으면 한국교회 부흥의 꽃이 다시 피어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4가지 실천을 당부하셨어요. 첫째 성경을 읽고 암송하라, 둘째 기도하라, 셋째 전도하라, 넷째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라. 이 가르침만 기억해도 한국교회는 뜨겁게 부흥할 것입니다.”

- 이 당시는 그래도 교회가 존중 받는 시대였는데, 지금 한국교회를 향한 비판과 혐오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교회가 너무 비대해지니까 나타나는 반작용일 수 있습니다. 말세의 징조지요. 하지만 성경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천국이 저희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심지어 대제사장들에게조차도 핍박을 받으셨지요. 십자가의 길은 세상에 환대를 받는 길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고 했으니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사회에 얼마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겸허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교회들의 울타리가 너무 높고, 세상으로 안 나가려고 합니다. 교회 밖으로 시선을 돌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더 섬기고 사랑을 나눈다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이미지는 훨씬 좋아지리라고 믿습니다.”

- 앞서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목사님은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시고 어렵고 곤경에 처해 있는 분들을 많이 찾아가셨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경제 인맥도 상당하시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애쓰셨는데요, 지도층의 복음화에 특별히 애정을 쏟으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예수님의 지상명령 때문입니다. 지도층이건 일반인이건 저는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지도층들에겐 누구도 선뜻 나서서 예수님을 전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들도 주님이 사랑하는 잃어버린 영혼인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더 적극적으로 지도층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변화가 되면 우리 사회에 복음이 더 빨리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교회 울타리 너무 높아… 세상으로 나아가야
대통령, 지금은 보수-진보 융합하고 포용할 때
2020년 프랭클린 그레이엄 초청 청소년 집회 계획

김장환 목사는 정치인들이 옥고를 치를 때면 성경책을 들고 찾아가기로 유명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안양구치소에 있을 때 면회를 다녀왔다. SK 최태원 회장과 롯데 신동빈 회장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김영삼 대통령 천국환송예배도 집례했다. 
세간의 시선을 피할 수도 있지만 김 목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데 구별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골프장 캐디도, 택시운전사도 어디서든 김장환 목사를 만나면 “예수님 믿으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려울 때 더 많이 찾아가고, 더 많이 기도해주는 것이 김 목사의 신앙이자 소신이다. 

특히 국가를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선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그는 전 세계 어디든지 달려간다. 수십 년 간 한-미관계를 견고히 하는데 그의 역할이 컸다. ‘국익을 위한 숨은 조력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 목사님께서는 한·미동맹을 강조하시고 실제로 한미관계에 상당한 가교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일각에서는 정교분리를 주장하지만, 교회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미동맹이 굳건하면 북 핵도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는 한미동맹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견고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받은 은혜는 기억하고, 베푼 은혜는 잊으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하는데요, 우리가 그 어려운 시절 미국 참전용사들에게 받은 은혜 덕분에 이 자유 대한민국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 은혜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살았지만 미군이 철수하고 정치인들이 잘못해서 지금은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미국에서 파송한 많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 땅에 교회는 물론이고 학교도 세워지고, 병원도 세워진 것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볼 때 교회도 국가를 위해 나서야 하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고 선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 지금 한국사회는 어떻게 보십니까? 2016년 촛불시위 이후에 정권이 바뀌고 현 정부에서는 적폐청산을 외치고 있습니다.

“적폐청산만 할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리더들에게 다 상처를 낸다면 우리나라에 존경받을 인물은 아마 하나도 없을 거예요. 촛불을 들고 나선 국민들이 나라 전체가 아닙니다. 태극기를 흔든 국민들이 나라 전체가 아니에요. 양쪽 모두 융합해서 보수와 진보를 껴안아야 합니다. 지금은 포용할 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대통령의 지혜와 총명을 위해 교회가 더욱 더 기도해야 합니다.”

-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청소년들이 살아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미래에요.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고, 전국 곳곳에 리조트가 생기고, 여가시간이 많아지면서 교회를 등한히 합니다. 한국의 입시제도는 청소년들이 교회에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스트레스 풀기 위해 게임과 오락에만 도취됩니다. 

어떻게 이것을 넘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님을 초청해서 대규모 청소년 전도집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2020년으로 예정되어 있어요. 잠실과 상암 양쪽 경기장을 잡아서 K-pop공연도 하고 청소년들이 다같이 모여서 말씀을 듣는 시간도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결신자를 불러내고, 지역교회로 연결하는 것까지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한국교회가 연합이 잘 되어서 청소년 부흥의 열기가 되살아나길 바랄 뿐입니다.”

김장환 목사는 1966년 한국 십대선교회 회장에 취임해 청소년 선교에 매진했다. 2010년에는 극동PK장학재단을 설립, 청소년들이 꿈을 이루도록 돕고 있다. PK장학재단은 김 목사를 유학의 길로 인도한 칼 파워스 상사를 기리며, 파워스 상사의 첫 이니셜인 P와 김장환 목사의 K를 따서 만들었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인 파워스 상사는 당시 ‘하우스 보이’로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김장환 목사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처음 보는 한국의 가난한 소년에게 미국으로 가는 배표를 끊어주고 명문 사립학교인 밥 존스 고등학교에 입학시킨 후 대학원까지 8년 동안 학비를 지원했다. 김 목사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일생의 은인이 아닐 수 없다. 

어려웠던 시절, 누군가의 따뜻한 도움이 지금의 김장환 목사를 있게 한 것처럼 김 목사도 경제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통해 학업의 길을 돕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이자 한국교회의 미래가 될 청소년들은 김 목사가 아끼고 아끼는 선교자원이다. 

이처럼 어린 청소년부터 어른까지, 지위가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만남이 있는 곳에 반드시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김장환 목사. 그는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달려갔던 ‘성실한 복음전도자’로 기억되길 원한다. 하나님과 만나는 기적의 체험을 더 많은 이들이 누리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미 여든이 넘은 고령이지만, 복음과 함께 할 때 그는 청년이고 영원한 현직이다. 지금도 그는 ‘더 어려운’ 사람을 찾아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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