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배보다 큰 배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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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배보다 큰 배꼽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7.12.27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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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 취재를 시작하고 묘하게 낯선 느낌을 준 단어가 있다. 바로 ‘순서자’라는 단어다. ‘증경총회장’처럼 대놓고 생소한 단어라면 그러려니 할 테지만 이 녀석은 뜻도 충분히 짐작할 만 한데 이상하게 입에 붙지 않았다.

필자에게만 낯선 단어인가 싶어 포털사이트에 ‘순서자’를 검색했다. 뉴스란에 게재된 상위 30개 기사 중 교계가 아닌 일반기사에서 쓰인 곳은 단 2건에 불과했다. 검색을 충실히 이행한 포털사이트도 뭔가 어색했는지 ‘순서지’로 바꿔 검색하시겠느냐고 물어본다. 이 정도면 교회가 아니고서는 웬만해선 쓰이지 않는 단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교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는 비단 ‘순서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은혜’나 ‘소명’ 또한 대중 사이에서 만나기 힘든 단어들이다. 그런데 듣기만 해도 은혜로운 이 단어들과 달리 ‘순서자’는 왠지 꺼림칙하다. 교회에서 유난히 ‘순서’에 자기 이름을 올리는 데 혈안이 돼있다는 방증처럼 느껴져 씁쓸하기까지 하다.

교계 행사들을 참석하면 유독 순서자들이 차고 넘친다. 축사, 환영사, 격려사로 이름만 바꾼 순서들이 각자 한 마디씩 하고자 줄줄이 늘어서 있다. 한 번은 10명이 넘는 ‘축사’가 순서지를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두른 경험도 있다. 영락없이 배보다 배꼽이 큰 모양새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계는 한 목소리로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외쳤다.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사람의 교만과 이론으로 점철돼 변질된 신앙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명예를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던 바울의 고백처럼 내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겠다던 올해 한국교회는 어땠는지 뒤돌아본다. 뜻 깊은 일들도 분명 많았지만 종교개혁 정신을 회복하겠다던 행사에서조차 ‘순서자’ 열전은 계속됐다. 비록 종교개혁 500주년은 지나가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은 끝나지 않았다. 새해에는 ‘나부터’ 낮아지고 예수만 자랑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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