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상부(名實相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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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名實相符)
  • 여상기 목사
  • 승인 2017.12.2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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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예수로교회

한라산에 눈꽃을 보고 왔다. 1100고지에 머문 설화(雪花)는 우화(雨花)처럼 쏟아진 흔적을 감추고 시린 나뭇가지를 감싸 안고 거룩한 자태로 겨울을 노래하고 있었다. 화실상봉(花實相逢)이라 했던가. 꽃과 열매가 한 가지에 머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고의 험세를 견디어 왔을까. 들숨과 날숨 사이에 숨겨진 쉼표를 이어가듯 거룩한 대지의 호흡은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봄의 소망을 기도하리라.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는 분주한 발걸음들이 제천화재 참사로 인하여 황망히 멈추어 섰다. 지난날의 발걸음이 그만큼 빨랐던 만큼, 걸음사이의 주름진 곳에는 정량적 지표로는 측정하기 어려운 낯부끄러운 일들이 즐비하게 숨어 있음을 성찰해보자.

새해 사자성어를 ‘명실상부(名實相符)’로 상정해본다. 넓게는 사회 전반에 좁게는 기독교계에 주는 함의(含意)가 저명하기 때문이다.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가정이 가정답지 못함은, 결국 우리가 우리답지 못한 나의 연고임이 아니겠는가(욘1:12).

대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세속적인 안락에 집착하면, 은혜의 터가 무너지고 영성은 빛을 바랜다. 지도력의 원천은 다스림이 아닌 섬김에 있고, 조직력이 아닌 영향력에 있음을 간과하지 말자. 교회의 부흥은 규모보다 거룩에 있고 목회의 성공은 성과보다 성화에 있음을 가늠하자. 성도의 삶이 믿음의 크기보다 순종의 깊이에 있음을 깨우치자.

유명무실과 허장성세(虛張聲勢)의 에봇을 벗고 그릇된 신앙체계와 망가진 자화상을 말씀으로 보수하여, 명실상부한 생명신학의 요람으로 은혜와 진리의 도성을 수축할 때이다.

역사는 언제나 시재적 현재가 난관의 고비였다. 총체적 위기의 벼랑 끝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시퍼렇게 살아 역사하신다. 앞 세대가 걸었던 삶의 궤적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지금 세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점검은 미래 세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출발점은 역시 사람이다. 제도를 만드는 자도 사람이고, 제도를 집행하는 자도 사람이며, 제도 위반을 감시하는 자도 사람이다. 명실상부한 사람됨이 만사의 물꼬를 튼다. 

도둑질한 아비를 관가에 고발한 아들이 아비가 중형에 처해지자 대신 형을 받겠다고 나섰다. 이를 두고 공자가 깊이 탄식하며 한 말이다. “그 정직이란 없느니만 못하고 그 효라는 것도 차라리 없는 것만 못하다. 한 아비를 가지고 두 번이나 명성을 취하다니….”

그렇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기면 곧음이 그 안에 있음이 자명하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지, 세상이 사람을 사는 것은 아니질 않은가.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인(仁)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리를 얻어도 반드시 잃는다. 지도력과 인품을 갖추었다 해도 권위가 서지 않으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 지도력과 인품과 권위를 다 갖추었다 해도, 도덕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지 못하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교회도 목회도 마찬가지다. 구호나 행사로 집단의 회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권모술수로 국태민안이 보장되는 건 더더욱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부끄러운 일이 없게 될 것임이라. 백범(白凡)은 생전에 우리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기보다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발가벗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명실상부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 되어보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말씀이 한해의 지렛대가 되어 우리의 소위를 살피고 명실상부한 주님의 사람이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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