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회의와 콘스탄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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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회의와 콘스탄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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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2.1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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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중세 후기의 개혁 회의(2)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1. 피사 범 종교회의

1409년 봄에 피사 범 종교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아비뇽에는 베네딕트 13세, 로마에는 그레고리 12세가 교황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범 종교회의는 추기경들에 의해 소집됐습니다. 여기서는 추기경들이 범 종교회의를 소집하는 권위를 소유한다는 것, 그리고 두 명의 교황을 소환하여 대분열의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범 종교회의에서는 베네딕트 13세와 그레고리 12세를 모두 해임하고 알렉산더 5세를 합법적 교황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해임된 두 교황은 범 종교회의에 결정에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결과를 가져왔지요. 이렇게 해서 대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피사종교회의는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말았는데 1409년 교황으로 선출된 알렉산더 5세는 1410년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요한 23세가 교황이 되었습니다. 

대분열은 더 큰 문제를 일으켰는데 교회분열이 국가분열로 이어진 것입니다. 교황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지지받기 위해 유럽 국가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아비뇽교황들은 스페인, 프랑스, 나폴리, 스코틀랜드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또 로마 교황들은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 영국, 아일랜드, 폴란드, 헝가리,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고 스웨덴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2. 콘스탄츠 범 종교회의

피사 종교회의 후 5년 만에 열린 이 두 번째 개혁회의는 중세 역사상 가장 크고 화려한 회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와 교황 요한 23세는 1414년 콘스탄츠 범 종교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5년에 니케아 범 종교회의를 소집했던 전례에 따른 것인데 350명이 넘는 고위 성직자 등 총인원 5,000명이 모였습니다. 

이 회의의 중요한 의제는 단일 교황 아래 교회의 통일과 개혁, 그리고 이단 처리 문제였습니다. 다수결에 의해 투표를 하면 요한 23세를 추종하는 이탈리아인들이 범 종교회의의 결정을 좌우할 수 있었으므로, 범 종교회의 참석자들은 요한 23세가 다수를 이용하여 범 종교회의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봉쇄하기 위해서 국가별 성직자 조합에 의해 투표하기로 의결했습니다. 각 국가별로 투표권이 하나씩 주어졌고, 범 종교회의에서 효력을 발휘하려면 5개 국가 조합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했습니다. 

이 범 종교회의는 스스로 로마교회 내에서 합법성과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회의의 칙령은 ‘지극한 성스러움’이라는 이름을 갖는데, 이 칙령에서는 교황 대신에 범 종교회의가 로마교회를 지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그레고리 12세가 사임했고, 여러 차례의 협상 끝에 1415년에 베네딕트 13세와 요한 23세도 해임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르티누스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습니다. 이렇게 범 종교회의는 교황 선출권을 추기경단에게서 빼앗았습니다. 또 이 회의에서는 위클리프의 사상을 정죄했고, 황제가 후스에게 안전 통행을 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 개혁자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안전을 보장하고 후스를 부른 요한 23세와 황제 지기스문트는 후스를 제거하려는 대세에 눌려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요. 이렇게 해서 후스는 한 달 후 화형에 처해졌고 재를 라인 강에 뿌렸습니다. 10개월 후 후스의 옛 친구 프라하의 제롬도 화형에 처했습니다.

이들 범 종교회의는 분열, 이단 개혁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회의에서는 교회 회의의 권위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결의를 했던 바 종교적 권위가 교황이 아니라 성경이라는 후일의 루터의 개혁 정신에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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