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셋째주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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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셋째주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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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7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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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감사 속에 담긴 축복(1)

누가복음 17:11~19
마태복음 14:13~31
찬송 380장


감사하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영적성숙도는 감사하는 태도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영혼의 특징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롬1:21). 감사하지 않은 영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며 그 마음이 미련하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시50:23).
예수님은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사셨습니다. 감사는 예수님의 삶의 습관이었고 기적을 창조하는 도구였으며, 예수님의 삶의 자세였습니다. 감사는 기적과 행복의 비결입니다. 감사를 배우고 훈련하면 인생의 미래가 밝아집니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감사의 차이입니다.
감사가 무엇입니까? 감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푼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감사는 아주 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데 한없이 인색합니다.
눅 17장에 보면 고침 받은 열 명의 문둥이 가운데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병이 나은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립니다(눅17:15~17). 열 명 중에 딱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 와서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 때문에 실망하였습니다. 감사는 받은 것을 받았다고 표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고침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습니다.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오늘의 기도
누구를 봐도 무엇을 해도 감사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화요일

목사와 성도의 관계!

빌립보서 1:8~11
찬송 569장


용비어천가 2장에 보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일 새 꽃 좋고 열매가 많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아니할 새 내를 이루어 바다에 가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가 깊이 이해하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관계는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가 사도 바울과 빌립보교회와의 관계였습니다. 목회자로서 바울이 어찌 모든 교회를 아끼지 않았겠습니까? 그의 고백대로 그는 약한 자들에게 더욱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회들과 비교할 때 빌립보교인들과는 보다 밀접한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사모’하는지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편애가 아니었습니다. 성숙한 동역의 관계가 바로 이런 마음을 준 것입니다.
바울이 옥중 생활을 할 때는 그들도 신앙을 지키는 일로 따돌림을 당하고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바브라 디도를 통해 바울을 돕기 위한 선교비와 위로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빌립보교회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든든합니다.
목회자로서 바울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바로 그들을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이 더 풍성해 지도록, 지극히 선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날까지 서도록, 의의 열매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길 믿음으로 축복의 기도합니다.
아무리 한국교회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이런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로 서 있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아직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이 땅의 모든 교회마다 뜨거운 사랑과 신뢰가 넘치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소서!

수요일

다니엘과 세 친구의 믿음

다니엘 3:13~18
찬송 336장


바벨론 제국에서 활동하면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자기가 만든 신상에게 절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세 명은 자기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최고의 신인 것을 믿었기 때문에 왕이 만든 신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세 명을 풀무불에 넣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으로 왕께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다니엘 역시 자기를 죽이기 위한 법안인 줄 알고도 늘 하던 대로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으로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 다니엘을 잡아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리오 왕은 여호와께서 다니엘을 살려준 것을 알고 자기가 관할하는 나라에 조서를 내렸습니다(단 6:26~27). 다니엘은 자기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들의 공통된 점은 포로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선택한 것입니다. 죽더라도 유대인의 자존심인 신앙은 포기하지 싶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학문과 신앙이 아닌 율법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로 갔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 ‘다니엘’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여! 나와 자녀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믿음을 갖게 하옵소서.

목요일

무익한 종의 감사

누가복음 17:7~10
찬송 594장


본문에 나오는 종은 주인의 집 안팎에서 여러 일들을 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며, 집안 살림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태도는 예상과는 다르게 매정하고 차가워 보입니다.
종일 밖에서 일하고 집에 들어온 종에게, 식사준비를 하고 주인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고 곁에서 시중을 들라는 것입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주인이 식탁을 마련하고 앉아서 먹기를 권하는 기대는 아예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과의 겸상(兼床)도 꿈꾸지 말아야합니다. 주인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해서 주인에게 종이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모습을 종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작음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소유는 주님의 것이고 우리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으니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고 암묵적으로 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마19:27). 하나님에 의한 피조물인 것을 자각하면 이런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골 1:16에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면 그 누구나 그 무엇이나 ‘하나님을 위하여!’ 있게 된 것들입니다. 내가 시간과 몸을 바쳐 일했으며 수고와 봉사도 많았으며, 또한 돈도 아낌없이 바쳤다고 해서 떳떳해 하거나 당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삶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자격이나 권리가 없는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에서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주를 위한 삶으로 오히려 감사하게 하소서! 무익한 종일지라도 계속 들어 써 주소서!

금요일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

사도행전 16:16~34
찬송 491장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늘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유럽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도착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는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행16:22)
원망과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매를 맞고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것에 감사하며 찬양을 했습니다. 구원에 대한 감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요 예수님을 전하다가 고난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한 밤중에 지진이 일어나더니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벗겨졌습니다.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러 하자 바울이 만류했고 간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바울과 실라가 두려워 그 앞에 엎드리고는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했습니다. 이에 바울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복음을 전하자 간수와 온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때리고 감옥에 넣도록 한 상관들은 부하를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라고 했습니다(행16:35).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고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기적을 베풀고 계십니다(잠4:23).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마음은 하늘에 두고 영원한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토요일

순결한 성도가 되라

요한계시록 2:18~29
찬송 287장


오늘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부딪치고 있는 가장 큰 윤리적 문제는 ‘이중 기준’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이중기준의 문제가 성도들에도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두아디라교회를 통해 이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두아디라교회에 편지하신 주님은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첫째, 예수님의 눈은 불꽃과 같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은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어 보심을 의미합니다.
당시 두아디라 교인들이 숨어서 은밀하게 행하는 뜻과 마음을 모두 살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았습니다. 주석은 매우 강한 광물질이요, 발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역시 심판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두아디라교회의 ‘사업’(works, deeds), 즉 그들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행위를 아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강한 책망을 함께 받았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더러운 죄로 심각하게 얼룩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평일이 되면 그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동업 조합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이세벨을 용납한 죄였습니다.
순결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또 돈의 유혹을 거절해야 하고, 순결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 신앙에 이중잣대는 없는지 살피고, 철저하게 회개하며 주님의 신부로서의 삶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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