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같은 13개 학교 뒤로한 채 다시 고아들의 아버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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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같은 13개 학교 뒤로한 채 다시 고아들의 아버지로”
  • 승인 2004.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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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의 나이중 반평생 이상을 기독교교육이 바탕이 된 교육사업에 헌신해오다 지난해 연말 아름다운 퇴장을 한 주인공이 있다.

자신의 인생 절반이 넘는 44년의 세월을 교육사업에 바쳐온 협성교육재단 신진욱장로(80·동심교회). 여든의 나이에 제 2인생의 전환점을 생각하며 교육재단의 경영정책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신진욱장로는 지난날을 회고하는 시간을 갖고 남은 삶 또한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바치겠다는 각오다.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 지난 1923년 경북 의성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신장로는 너무나 힘든 집안의 경제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 4학년을 채 마치지 못했다.

오직 물려 받은 것이라고는 헌신적이었던 신앙의 소유자인 어머니로부터 받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뿐,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시절 집을 나와 이것 저것 손에 잡히는대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으면서도 그의 마음속 비전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것은 바로 “목사가 되어서 선교하고 교육하겠다”는 굳은 의지였다. 생전에 어머니께로부터 매일같이 듣던 음성 “천년을 살듯이 일하고, 내일 죽을 듯이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은 언제나 교훈이 되었고 힘들때면 늘 되새기는 말씀이었다.

매일이 힘든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기도했다. 그 결과, 대구사범학교 강습과를 마치고 황해도 신계군에 위치한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 부임하면서 그의 교육사업은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3년의 세월을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보낸후 해방 서너달을 앞두고 다시 고향으로 발을 돌렸다. 당시 대구와 경주 등지를 오가며 교직생활을 했지만 전쟁고아들의 처참한 현실에 가슴아파 마냥 지켜 볼 수만은 없었던 것이었다.

급기야 그는 100명이 훨씬 넘는 고아들을 돌보며 동고동락하기에 이르렀다. 경주 적산가옥에 고아들과 함께 지낼 터를 마련하고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날 순식간의 화재로 고아들은 보금자리를 잃고 말았다. 임시숙소도 마련해 보았으나 무리였다. 연고를 찾지못한 3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 고아들은 이웃친척 등 연고를 찾아 모두 보금자리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아이들과 함께 대구로 이동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대구에서 그의 교육사업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현재의 경북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 터에 원사를 짓고 다시 새출발의 마음으로 가다듬었다.

그러나 구호물자를 통해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해결됐으나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그를 또 괴롭혔다.

입학허가가 좀처럼 쉽지 않았던 당시에 고아였던 아이들이 또래보다 나이도 많고 학비도 내지 못한다는 까닭으로 인근 학교에서 입학을 거부하기도 했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는 ‘학교를 세워야 겠다’고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갖은 고난 끝에 신 장로는 꿈에 그리던 학교법인 자혜학원의 설립을 인가받게 됐다. 지난 1955년 2월 그렇게 지금의 협성교육재단의 발판을 마련하고 당해 4월 18일 협성상업고등학교에서 기쁨으로 첫 입학식을 치렀다. 힘겨운 걸음마를 시작한 협성상고는 거듭되는 시련을 맞아야 했다.

아무런 사심없이 빌려줬던 학교운동장이 대통령선거 유세장소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갖은 핍박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학교운동장을 유세장소로 빌려줬던 사건이후 학교는 학교 회계에 관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경영 전반에 대한 감사, 건축, 학사행정, 교실의 학생인원수까지 검사를 한 것이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학교재단설립 과정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면서 재단 구성요소 가운데 기본재산 미확보를 문제로 지적했다.

교육재단을 설립할 당시 친척들의 과수원 논밭전지를 차입키로 한 과정에서 등기서류를 제출하지 않고 차후 보완각서를 제출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를 미소 머금은 얼굴로 잠시 회상하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정말이지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죠. 우리 학교를 끝장낼 심산으로 조사해오는 담당검사를 당할 재간이 없었죠.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쪽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던 사건이 일단락되는 시점에서 담당검사가 바뀌게 됐죠.

새로 인계받은 담당검사는 서류를 제출하고 보완하는 시기만 늦었을뿐 사기성은 없으니 학교로 돌아가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라는 것이었어요. 정말 하나님 은혜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답니다.”

‘비가 오고 난 후 땅이 더욱 굳어진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협성상고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 지난 75년 더 좋은 터로 학교부지를 이전하면서 일반계 고교로의 전환도 이뤄졌다.

지난 1980년 경일여자고등학교까지 총 13개의 학교를 만들며 협성교육재단을 설립케 됐다. 젊은 시절 학교를 운영하며 독재정권과 싸워온 까닭이었을까. 당시 45세의 시골뜨기가 소위 잘 나가던 국회의장 출신의 여당의원을 물리치고 8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경제적·정치적 시련속에서도 학교교육에 열정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앙의 힘과 하나님의 도우심, 보호하심, 동행하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고백하는 신진욱 장로.

지난해말 퇴임식을 갖고 일선에서 물러난 신 장로는 이사장직을 3남 철원씨에게 일임한 후 뒤에서 힘이 되어줄 것을 약속했다.

일평생을 협성교육재단에 사활을 걸었던 신 장로는 “13개 모든 교육시설이 항상 나의 자녀라 생각하기에 몸은 떠나도 마음은 영원히 학교에 남아 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냄과 함께 보다 내실의 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학원으로 거듭날 것을 기도했다.

신 장로는 고아원을 처음 운영할때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설립한 에덴원 원장으로 아이들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내려 다짐한다.

하지만 7전 8기의 의지를 보여준 신 장로에게도 회개하고도 모자랄 것 같은 믿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제치하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당시를 회고하며 아쉬워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당시 신사참배를 강요당했고 절개를 굽히지 않았지만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신사 앞에 무릎을 꿇고 말은 것이었다. 어쩔수 없는 상황에 무릎을 꿇으면서 그는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 이 비굴한 모습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게 해 주옵소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농사도 짓고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면서 협성교육재단의 발전을 위해 뒷바침하는 일이 신진욱 장로의 마지막 회개와 사명인듯 하다.

<송준영기자> 1955년 자혜학원 설립 대구최대 사학으로 성장 지난 1955년 자혜학원을 인가받아 출발한 협성교육재단은 48년 동안 중학교 6곳 개교, 고등학교 6굣 개교, 유치원 1곳과 사회복지법인 1곳을 만들어내며 국내 최대의 중등사학으로 발전했다. 지난 1955년 4월 개교한 협성상업고등학교는 1985년 협성고등학교로 교명을 개명하고, 인문계로 전환하면서 협성교육재단의 모태로 지역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1960년에는 협성중학교가 개교했으며, 이듬해인 61년에는 경북여자상업고등학교와 경북여자중학교가 개교했고 1965년에는 지역 최초의 전문예술인 양성기관인 경북예술고등학교와 경일여자중학교 개교, 1966년에는 경상여자중학교가 개교했다.

이밖에 협성교육재단은 경영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대구서중학교와 금호중학교를 인수, 70년대 중반 소선여자중학교와 금호고등학교를 개교하고 지난 1980년 현재의 규모인 협성교육재단으로 통합했다. 소선여자중학교는 신실한 신앙의 소유자였던 어머니를 기념하는 학교로 설립되었다.

협성교육재단은 지난 1976년 개원한 협성유아원을 포함, 총 13개의 교육기관에서 그동안 35만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7백여명의 교직원이 재직하고 있으며 3만여명의 학생들이 협성교육재단에서 기독교교육이 바탕이 된 교육 아래 성장하고 있다.

교육재단의 이름인 협성(協成)의 뜻은 ‘많은 사람이 힘을 합한다’는 뜻으로 종교적 의미와 함께 많은 협성인들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뭉치면 성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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