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개 논제 붙은 후, 독일인 90% “루터”를 외쳤다

종교개혁 500주년, 종교개혁자들의 길을 걷다(상) 하이델베르크=김성해 기자l승인2017.08.08l수정2017.08.31 18:15l14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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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톨릭 신부 루터가 500년 전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 논제를 내걸며 전 유럽에 불이 당겨진 종교개혁.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교회 움직임이 한창이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도 종교개혁 태동과 과정,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 때에 맞춰 독일 등 유럽을 찾고 있다. 

본지는 지난 7월 10일부터 16일까지 종교개혁 현장을 직접 탐방하고, 생생한 종교개혁 역사를 전달하기 위해 종교개혁 500주년 기획 르포를 마련했다. 르포 취재에는 백석대학교 부총장 주도홍 교수가 동행해 종교개혁 역사와 배경을 세세하게 해설했다. 취재에는 C채널방송도 함께했다.  

이번 여정에서는 종교개혁 역사뿐 아니라 500년 전 종교개혁이 유럽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본지는 3주에 걸쳐 종교개혁가들의 발자취와 종교개혁의 산물에 대해 현재 시점에서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 슈파이어 프로테스탄트 기념교회(Protestantische Gedächtniskirche) 입구에 세워진 마르틴 루터 동상. 그 뒤에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후임자인 작센의 요한 선제후와 헤센의 필립 등 루터를 도운 이들의 동상이 루터 동상을 둘러싸고 있다.

7월 10일 새벽, 대한민국 인천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16시간이 걸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이 곳은 독일에서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이자 독일 및 유럽의 경제 및 금융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는 구 서독 지역 루터 탐방 길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공항에서 나와 주변을 살피자 독일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큰 도시답게 높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도시의 모습이 완연한 프랑크푸르트는 1521년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를 오고가는 길목에서 각각 1박씩 머무르면서 자신의 교리에 대해 토론하고 축복 기도를 한 곳이기도 하다.

첫 발을 디딘 곳부터 종교개혁의 흔적 중 하나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숙소에서 일주일 동안 펼쳐질 종교개혁 역사 흔적들을 기대하며 첫 밤을 보냈다.

▲ 마르틴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십자가 신학, 영광의 신학을 주장하며 40개의 논제를 발표했다. 사진은 하이델베르크 전경.

종교개혁의 최초 논쟁지, 하이델베르크 대학
이른 아침,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하이델베르크 대학가이자 과거 도시의 번화가였던 거리였다. 누군가 이 곳이 대학 거리라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학교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다.

이 곳은 한국 대학들처럼 울타리 안에 학교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길과 길 사이, 그리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학교 건물이 듬성듬성 세워져있었다.


1386년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한 이후 처음으로 공적인 자리에서 연설한 곳이다. 1518년 4월 26일, 어거스틴 수도회는 루터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초대해 ‘95개 논제’에 대한 정확한 입장을 듣고자 했다.

루터는 직접 주재 하에 대학 인문학부 강의실에서, 대학생들과 수도사들 앞에서 로마 교황청의 화려한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비판하고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주장하며, '하이델베르크 논박'에서 40개 논제를 밝힌다. 이 논제는 좀 늦은 1520년 프랑스 파리와 네덜란드 츠볼레에서 28논제로, 1530년에야 비로소 비텐베르크에서 40논제로 출간됐다.


주도홍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논쟁은 최초의 심문이자, 종교개혁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며 “이날 루터의 40개 논제와 십자가의 신학을 들은 인문학부 학생들은 비텐베르크 대학으로 편입했으며, 어거스틴 수도원에 속한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났다. 또한 이날 심문 현장에 참여한 인물들 중에서 마르틴 부처 등 여러 명의 종교개혁자들이 탄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거리에서 네카(Neckar)강 쪽으로 나오자 하이델베르크 성과 또 다른 대학 건물들이 보였다. 산과 산 사이에 세워진 건물들은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성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축물은 루터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녹음진 산과 붉은색 지붕의 집들이 뿜어내는 평화로움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지닌 긴박함, 혼란, 강압적인 느낌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시간이고 머물면서 아름다운 풍경들을 눈에 담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을 위해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를 떴다.

▲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마르틴 루터가 황제 칼 5세 앞에서 변증했다고 전해지는 장소.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고백의 현장
“나는 여전히 내가 인용했던 성서 말씀에 묶여 있습니다. 나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잡혀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그리고 취소하고 싶지 않습니다. 양심에 거리끼게 행하는 것이 위험하고 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루터가 용기 있게 변증한 내용, 특히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라는 문구는 독일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 사이에 위치한 이 곳 보름스 역시 루터와 뗄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장소다.

1521년, 루터는 95개조 논제로 야기된 여러 신학적인 입장들에 대한 변증을 하기 위해 황제 칼 5세가 주재하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참여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당시 루터가 머무르던 비텐베르크와 보름스의 거리는 500km를 훌쩍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루터는 명령에 순종했고, 1521년 4월 2일 비텐베르크를 떠났다. 이후 보름스 제국의회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일.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루터는 에어푸르트, 고타,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설교를 했고,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루터를 외쳤다.

'루터 로드'의 저자 구영철 목사는 "당시의 현장 분위기는 교황사절 알레안더가 교황청에 보낸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보고서에는 ‘독일인의 90%는 루터를 외쳤으며, 나머지는 로마 교황청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열렬한 환호 속에서 루터는 제국의회에 참석했다. 95개조 논제를 철회시키기 위해 진행된 제국의회였지만, 루터는 하나님께 의존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가 제국의회에 참석해 변증한 장소는 보름스 대성당 옆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정원으로 변했지만, 그가 서서 고백했던 곳은 그의 변증문과 함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루터의 큰 신발'을 발견할 수 있는데, 구영철 목사는 "루터의 큰 신발은 지난 4월 18일 보름스 로타리 클럽의 기증으로 새로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루터의 흔적을 찾는 이들은 변증의 현장을 눈으로, 카메라로 담아갔다. 또 루터의 큰 신발을 신으면서 그의 용기 있는 고백을 묵상하는 사람도 보였다.

당시 30대 젊은 신학자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다시 한 번 주장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95개조 논제’과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난 진리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올바른 신앙에 대한 용기와 변화의식, 실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보름스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종교개혁 기념비는 종교개혁이 루터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을 통해 이룰 수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홀로 아닌 여럿이서 이뤄낸 종교개혁
대성당 근처 루터 광장에는 세계 최대의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념비 가운데에는 성경책을 들고, 주먹 쥔 손을 성서 위에 올리며 굳은 결심에 찬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루터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그리고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이 루터의 주변에 함께 세워진 것이 이 기념비의 특징이다.

루터의 양쪽에는 현자 프리드리히 선제후와 헤센의 필립 방백이 서 있으며, 뒤에는 필립 멜란히톤과 요한네스 로이힐린이 있다. 또 루터 동상 주변에는 적극적으로 종교개혁에 참여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한 31개 개신교 영지들의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루터 동상 아래는 여러 종교개혁자들의 동상과 당대 선제후들의 모습이 담겨있으며, 종교개혁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도 함께 조각되어 있다.

루터의 동상이 다른 동상들과 함께 세워져있는 모습은 하이델베르크 남서쪽 30여 km에 위치한 슈파이어 프로테스탄트 기념교회(Protestantische Gedächtniskirche) 입구에서도 볼 수 있었다. 제국의회 당시 루터의 추방에 대해 친루터계 소수파였던 ‘복음파’ 6명의 제후들과 14개 제국 도시들은 황제의 결정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후대는 이들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이 기념교회를 건축했고, 루터와 이들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웠다.

입구 가운데에는 마르틴 루터가 한 손에는 성서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먹을 꽉 쥐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갑옷을 입은 군인 모양의 동상들이 원을 그리며 루터의 동상을 둘러싸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 전준봉 담임목사는 “동상의 모습은 루터 혼자서 종교개혁을 이뤄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제 칼 5세는 루터에게 빠른 시간 내 보름스를 떠나라고 했으며, 루터를 돕는 자는 같은 적으로 취급해 시민권을 박탈하겠다고 명을 내렸다”며 “그러나 루터는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비밀 지시로 비서이자 루터의 친구였던 슈팔라틴의 철저한 위장 납치 작전을 통해 쫓겨나는 도중 몸을 숨길 수 있었고,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성서 번역 작업을 하는 등 종교개혁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종교개혁 기념비와 동상을 보면서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루터의 개혁을 존중하며 그의 사역이 날개를 펼 수 있도록 조력한 자들의 연합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국교회가 루터와 조력자들처럼 연합하여 개혁을 이룰 수 있길 기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이델베르크=김성해 기자  shkim@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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