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혜 환경과 신앙 역사, 애국이 함께하는 백령도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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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 환경과 신앙 역사, 애국이 함께하는 백령도로 오세요”
  • 백령도=이인창 기자
  • 승인 2017.03.2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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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200년 믿음의 역사 간직한 섬

서해안 최북단, 북한 장산곶과 마주한 섬
121년 중화동교회, 섬 인구 70% 복음화
종교개혁 500주년 국내 ‘성지순례’ 코스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해 쾌속선으로 네 시간을 달려 도착할 수 있는 우리나라 서해 최북단섬 백령도.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면서도 북녘 땅과 마주선 긴장감을 주는 대한민국 땅이다.
특히 황해도 소래교회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자생적으로 설립된 중화동교회가 백령도에 있다. 그 영향 때문에 백령도는 복음화율이 70%에 달하는 한국교회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현장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많은 사람들이 유럽 종교개혁지를 찾고 있지만, 국내에 숨겨져 있는 곳을 성지순례지를 다시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백령도 배편에 몸을 실었다.

감춰진 복음화의 역사 ‘백령도’
인천항을 떠난 2천톤급 하모니플라워호는 보통 여객선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려 소청도, 대청도를 지나 마침내 용기포 신항에 도착했다. 배가 커서인지 걱정했던 멀미는 전혀 없었다. 백령도 주민조합 초청으로 방문한 이번 여행길에는 백령도에서 20년째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이광현 대표(까나리여행사)가 동행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이 대표는 백령도에 대한 정보를 쏟아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백령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이며, 현재 2,100여가구 5,400여명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전국에서 8번째나 되는 큰 섬이지만 북한과 바로 접해 있는 특성 때문에 대부분 숙박업소가 해안가에 없는 것도 특징이다. 천혜의 자연경관은 말보다 직접 둘러보면 될 일이라 했다. 
무엇보다 한 때 백령도 인구 10명 중 9명이 기독교인이기도 했다는 이유가 궁금했다. 중화동교회가 설립 121년을 맞았고 백령도에는 100년 이상 된 교회가 네 곳이나 된다.

▲ 1896년 백령도에 처음 세워진 중화동교회 전경. 중화동교회를 모태로 백령도 내 복음은 확산됐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백령도의 어머니 교회 ‘중화동교회’이다. 중화동교회는 1896년 당상관 허득 공(公) 주도로 설립된 자생교회이다. 허득은 성경을 가지고 백령도에 유배온 세 명의 선비와 함께 주민들을 모아 첫 예배를 드렸다.
몇 차례 교회를 건축하면서 초창기 교회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쉬웠다. 현재 건물도 예배당 외관은 벽돌로 덧대어놓았지만 안전진단 결과가 좋지 않아 신축이 필요해 보였다. 중화동교회 예배당 바로 옆에는 지역교회와 옹진군이 힘을 모아 2001년 건립한 ‘백령기독교역사관’이 중화동교회와 백령도 기독교 역사를 한눈에 이해하도록 도왔다.
중화동교회가 120년 전 첫 예배를 드렸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보다 80여년이나 앞서 신앙의 뿌리를 백령도에 심었음을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게 됐다. 1816년 영국함대가 처음 복음을 백령도에 심었고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도 이곳을 찾았다.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도 1865~1866년 백령도를 근거해 활동한 기록도 확인했다.
특히 1884년 황해도에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 소래교회가 세워졌고, 소래교회 설립자 서경조 목사가 중화동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서울에 머물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중화동교회 당회장이 돼 주었고, 직접 백령도를 방문해서는 3일간 직접 신앙교육을 하고 7명에게 세례를 주기도 했다.
중화동교회 조정헌 목사는 “허득 공이 교회를 설립했다면 아들 허간 목사님은 백령도 주민들에게 깊이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고 양육시켜주신 분입니다. 사곶교회, 진천교회, 화동교회가 설립 100년 이상이 됐고 같은 뿌리를 둔 백령도와 소청도, 대청도 출신 목회자만도 100여명에 이릅니다. 교회들은 같은 교단(예장합동)이면서 매주일 모임을 같이하며 협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 중화동교회 조정헌 목사 "백령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은 한 뿌리입니다."

“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생활입니다”
백령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보면 위도 상으로는 북한 땅에 더 가깝다. 휴전 당시 군사분계선이 지금처럼 구분되지 않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백령도에서는 유독 북한 사투리를 쓰는 주민들이 많다. 배를 타고 조금만 가면 황해도 장산곶이다. 거리로는 17킬로미터 불과하다. 6.25 동란 당시 잠시 내려왔다가 되돌아가지 못한 주민들은, 지척에 부모와 형제를 두고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지금까지 살아왔다.
백령도 면사무소 뒤편으로 약 1㎞ 정도 떨어진 뒷산에는 심청각이 있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고전 심청전에서 심청이 빠진 인당수가 백령도와 가까운 바다라고 고증하고 있다. 그것을 기념해 만든 전망대이다.
이곳 심청각에서는 맨눈으로도 북녘 땅이 바라다 보인다. 맑은 날에는 헤엄쳐서도 갈 것 같다는 주민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그 짧은 거리 사이에 수백 척의 중국 어선들이 조업하는 풍경은 당황스럽다. 경제사정이 어려운 북한 당국이 자국 NLL에서 중국어선의 조업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새까만 중국 어선을 보고 있자면 분노가 치미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고 만다.

▲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백령도에는 또 다른 상처의 현장이 있다. 지난 2010년 3월 26일 46명 우리 해군장병이 전사한 천안함(PCC-772) 폭침사건도 백령도 인근에서 발생했다. 천안함 희생자들이 조류에 떠밀려왔다는 용트림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게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파도는 기암괴석 절벽에 닿아 부딪히고 가마우지와 갈매기는 부지런히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섬 서편에 세워진 천안함 위령탑을 방문해서야 비로소 이 바다가 희생자들이 수장된 곳임을 실감했다. 탑 한 가운데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유리관에 담겨 순국 장병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10여분 올라와야 하지만 섬을 찾는 관광객들은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 헌화한다.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는 화동교회 박윤환 목사를 방문해 천안함 폭침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백령도 교회들은 매월 셋째주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를 같이 엽니다. 그런데 그날 기도회를 하는데 함포소리가 들리고 응급처치를 위한 앰뷸런스 소리가 급하게 들렸습니다. 당시 백령도 교회들이 뭉쳐서 현장을 지원했었지요.”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란 이름이 난무하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귀한 기도의 현장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북한 땅을 보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는 생활입니다. 대부분 나이든 교인들은 한결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박 목사의 설명이 큰 울림으로 느껴진다.

▲ 까나리여행사 이광현 대표 "성지순례 순례를 희망한다면 문의하세요. 배 승선료 할인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진하게 느껴요”
백령도 면적은 51제곱 킬로미터, 해발고도는 184미터에 불과하지만 곳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중화동교회 앞에 ‘연화리 무궁화’는 천연기념물 521호이고, 지각변동 습곡구조를 보여주는 용트림바위 인근 ‘남포리 습곡구조’는 천연기념물 507호이다. 진촌리에서 동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감람암 포획 현무암 분포지’는 천연기념물 393호이다.
백령도를 누비다보면 발길닿는 곳에 천연기념물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에는 ‘찰칵’ 누를 때마다 작품이 된다. 특히 광활하게 펼쳐진 사곶해변과 콩돌해변은 도시에서의 찌든 마음을 뻥 뚫어 준다.
카나리여행사 이광현 대표는 “승선인원이 한정돼 있어 주말보다 평일에 백령도를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종교순례와 안보관광, 자연관광을 한번에 경험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섬이에요. 지방자치단체도 종교개혁 순례를 희망하는 단체에 한해 배삯 할인혜택들을 검토하고 있어서 사전에 문의하고 찾아오면 좋겠습니다.” 지금, 서해 복음의 출발지 백령도로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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