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언더우드가 세운 교회에서 횃불 들었던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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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언더우드가 세운 교회에서 횃불 들었던 청년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7.01.25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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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희망을 찾아간 믿음의 선배들
▲ 새문안교회 대학생회(1966~1988) 청년들은 이제 중장년들이 되어 후배를 위해 ‘시대의 횃불’을 기록으로 남겼다. 지난 20일 대표집필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가 책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출신, 희망의 여정 ‘시대의 횃불’ 발간
기독청년들의 민주화 운동사, 후세대를 위한 기록으로 남겨

국민들의 주권이 무참히 농락당한 최근 일련의 사태에 민심은 광화문광장에서 촛불로 모였다.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흘려버린 것 마냥 정권의 부도덕은 정점에 이르렀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국민들은 같은 목소리로 정의를 외쳤다. 

40여년 전에도 그랬다. 군부정권의 장기집권에 맞서 유신헌법 철폐를 외쳤던 기독 청년들이 있었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였다. 그 때는 횃불을 들었다. 보이지 않은 ‘희망’을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고 밝힌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1895년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청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 세운 장로교회. 1973년 11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청년들은 언더우드 기념강연회를 마치고 교회 입구에서 횃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갔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기독청년 구국선언도 낭독했다.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학생들은 종로경찰서에 끌려갔고, 다음날 동아일보 만평에도 실리면서 반향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교회가 울타리가 돼 주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는 청년들이 구속되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주기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시대는 나아졌지만 잘못된 과거가 반복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서울 광화문에 폭설이 내린 지난 20일 경복궁 바로 옆 대한출판문화회관 강당에는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새문안교회 청년회 출신들이 매서운 한파를 뚫고 한자리에 모였다. 시대의 횃불을 들었던 믿음의 청년들, 그들이다. 

김용담 전 대법관, 권진관 성공회대 교수, 전 출판문화협회 회장 부길만 교수, 전 여성개발원장 서명선 박사, 전 중앙공무원교육원장 유영제 교수, 크리스천아카데미 이근복 원장을 비롯해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출신들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지금도 하고 있다. 

이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민주화운동 역사를 기록한 ‘시대의 횃불’ 출판기념회가 열린 때문이다. 2015년 책을 집필하기로 했고, 역사편찬위원회를 꾸렸다. 

1966년 창립해 1989년 해체된 대학생회 흔적은 사라져갔다. 대학생회 출신의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역사신학)가 대표집필을 맡아 많은 사람들의 회고와 증언을 듣고 역사적 검증을 거쳤다. 책을 쓰기로 한 이유는 하나. 한국 기독청년들의 운동사를 일차자료로 남겨 후배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공안조작 ‘민청학련’ 사건에도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회원들이 연루돼 고문과 옥고를 치러야했다. 최근 사법부는 민청학련 피해자들에 대해 잇단 무죄를 선고했다. 

부길만 교수는 “시대의 횃불을 출간하는 중에 광화문 촛불집회가 열렸다. 1973년 우리가 참여했던 ‘횃불시위’가 다시 재현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그래서 더 우리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둬야겠다는 생각했다”고 이야기했다. 

해체되기 전까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교회 안 신앙공동체에서 머물지 않았다. 당시 매주 세미나를 열고 신학과 사회과학, 문학을 공부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기 위해 빈민들이 살고 있는 판자촌, 형편이 어려워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들에게 찾아가 야학교사가 돼 주었다. 농촌교회를 돕고 일손을 돕기 위해서도 떠났다. 

▲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가 펼쳤던 민주화운동 역사를 담은 '시대의 횃불' 출판기념식이 지난 20일 한국출판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대표집필자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가 책에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학생회 야학은 단순히 검정고시를 위한 것이 아닌 노동자들의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진짜 공부를 가르쳤다. 야학 모델처럼 돼 다른 교회와 대학 동아리의 야학개설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5년 회장을 지낸 이근복 목사는 “대학 1학년이던 1973년 문래동에서 야학을 처음 시작하며, 약자와 함께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 시작된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가치가 지금의 사역으로 이끌었다”고 회고했다. 이 목사는 장신대 신대원을 졸업해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밑바닥 사람들의 섬김이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여전히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다. 

출판기념회에는 1970년대 청년부 지도목사로 대학생회를 품었던 김종렬 목사(목회교육연구원장)가 참석해 옛 제자들을 끌어안았다. 이제는 누가 스승이고 제자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가 됐지만 그때를 회상하면 마음이 아련해지는 느낌이다. 

이들은 새문안교회를 담임했던 강신명 목사에 대해 당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면모를 지녔다고 추억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회도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활동들을 적극 전개할 수도 있었다. 아쉽게도 대학생회와 청년회는 1988년 당회 결의로 해체됐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새문안교회에서 예수를 영접했다는 예장 통합 사무총장 변창배 목사는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열심이던 주변 선배들이 모두 교회에 출석했었다. 약자들을 돌보는 모습에 감동해 저도 신앙생활을 결심했다. 그 때는 모두가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이었다”고 회상했다. 

현재 새문안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30대 초반 조성우 씨는 “전설적인 선배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영광스럽다. 지금 청년들의 모습이 과거 선배들과 관심사가 많이 달라 아쉽지만 그 역사를 기억할 것”이라고 전했다.

탁지일 교수가 책 안 ‘새문안 대학생회 역사’ 에필로그에 남긴 글이 인상적이다. 
“새문안 대학부 모두 새벽이슬 같은 주님의 청년들이다. 130년 전 청년 언더우드가 설립한 새문안에서, 그리고 1960~80년대 암울한 세상에서 용기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젊은 대학생들의 고향 새문안에서 이 시대의 젊은 새문안 청년대학생들이 그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오늘도 살고 있다”.

▲ '시대의 횃불' 발간을 처음 결정하는 계기가 된 2015년 OB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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