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교와 시대정신(2)-한때 '예배제한' 정부와 마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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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학교와 시대정신(2)-한때 '예배제한' 정부와 마찰
  • 승인 2001.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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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1일을 전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만세시위가 유관순이라는 이화학당 학생을 통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학교가 가르쳤던 민족 자아의식 교육과 기독교정신이 우리나라 현실과 맞물리면서 터져 나온 필연인 것이다.
최근 천안대학교가 이 같은 유관순의 기독교정신을 학문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유관순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기독교학교의 민족사적 위치를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1938년은 7년전 일어난 만주사변, 즉 중국침략을 통한 대륙진출을 모색하는 절정기였다. 이른바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이 때 기독교학교는 한가지 벽에 부딪힌다. 소위 궁성요배와 신사참배가 그것인데 우상숭배 금지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기독교학교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휴교하거나 자진 폐교하는 사태가 속출한다.

이 당시 한국교회들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식이기 때문에 참배해도 좋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총회에서 통과시키기에 이르고 몇몇 지도자들은 일본현지에 들어가 직접 신사 앞에서 충성의 맹세를 하는 등 오점을 기록한다.

이 때 숭실전문학교·숭실학교·숭의·경신·신명·계성학교 등은 휴교했으며, 광주에 있는 숭일·수피아학교와 목포의 정명·영흥학교는 완전 폐교처분됐다. 또 전주의 신흥학교도 자진 폐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기독교학교는 일반학교와 함께 일제의 최후발악으로 숨통 조이는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해방 이후 왕성할 것으로 예상됐던 기독교학교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한차례 수난을 당해야 했다. 북쪽 소련지역을 넘어 남진정책으로 한반도에 착륙한 공산주의가 그것인데 이로 인해 기독교정신이 가장 왕성했던 북한의 대도시들, 예를 들면 평양이나 원산, 함흥지역에 있던 기독교학교들이 공산주의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속속 남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것도 전쟁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북한에 있으면서 일제 신사참배 정책으로 문을 닫았던 숭실학교는 공산주의의 종교박해로 남으로 이주, 1948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숭의·보성학교는 1950년에 그리고 광성학교는 1952년, 호수돈은 1953년, 송도학교는 1958년에 각각 개교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 시기 기독교계 학교들은 재건·승격·신설 등 해방 이후 가장 놀라운 발전을 보여주게 된다. 이 같은 우리나라의 학교발전은 양적인 성장과 더불어 질적인 문제, 즉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여야 하는데 정치적인 혼란이 이를 더욱 느리게 했다는 평이다.

특별히 기독교학교의 경우 ‘기독교인 교사’를 확보해야할 중차대한 과제를 남겨 놓고 이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보여 갈수록 기독교적인 색채가 옅어지는 아쉬움을 보인다. 또 하나 아쉬움은 기독교계 학교가 우리나라 대다수교육을 책임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성경공부·예배시간 등 학교고유의 문제를 제한, 공교육 기관으로 자리잡도록 정책을 추진하는데서 나타난다.

이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자 기독교계 학교는 ‘한국기독교학교연맹’ 을 창립, 각 교단 교육담당 부서와 긴밀한 협의창구를 만들어 사직당국에 진정서를 내기도 한다. 1964년 창립된 기독교학교연맹은 감리교가 1970년 9월25일 ‘기독교학교 교육헌장’을 발표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최근 기독교학교는 입시교육에 밀려 기독교정신을 실현하는데 어려움을 보이고 있다. 명문중·고등학교는 명문대학교에 얼마만큼의 학생을 진학시키느냐가 기준이 된 최근의 현실에서 기독교학교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그 중 몇 가지를 들면, 교회와 학교의 관계가 먼저 제대로 정립돼야 할 것과 기독교학교가 추구해야 할 예배·성경연구 등을 보장하는 법제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져 있는 상태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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