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후지(然後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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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후지(然後知)
  • 여상기 목사
  • 승인 2016.08.0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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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예수로교회

어느 사람이 깜깜한 밤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디뎌 벼랑에 떨어지게 되었다. 도중에 용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 가지를 잡고 몇 시간을 버티어 보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죽었구나 하며 손을 놓았다. 그런데 떨어지고 보니 땅에서부터 겨우 6인치 정도밖에 안 되는 곳에 매달려 있었다.

미국의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교수의 책(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에 소개된 일화다. 사실을 사실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인식과 판단의 오류로 엉뚱한 행동의 결과를 자초한다는 것이다.

값진 진주목걸이를 잃어버렸다. 온갖 곳을 찾아 헤매었으나 목걸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근심에 쌓여 포기하려는 순간, 그 목걸이가 바로 자신의 목에 걸려 있음을 깨달았다. 중국 명말 문인화가 진계유(陳繼儒,1558~1639)는 이를 연후지(然後知)라 했다. 지나고 난 뒤에야 알고 깨닫는다는 말이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게 되고,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깨닫게 된다. 무슨 일이든 당면한 문제나 상황 때문에 본질을 호도하지 말고 사실의 인식과 정제된 판단으로 의연하게 근본적인 대안을 차분히 살펴볼 때이다. 신발을 신은 채 가려운 발바닥을 긁어봐야 시원할 리가 없지 않은가(隔靴搔癢).

모든 인간에게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언(正言)이 여전히 무색한 오늘이다. 청년실업, 비정규직의 양산과 고용 불안, 양극화와 계층 간의 갈등, 생태계의 혼란과 파괴, 농촌사회의 피폐는 여전히 우리의 행복을 요원케 한다. 60~70년대 농촌마을의 삶의 힘겨움과 버거움이 여전히 오늘도 산업사회에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중세 서구사회에서 연유된 종교 갈등이 여전히 오늘도 지구촌 곳곳을 무대로 전쟁과 살상이 엄연히 자행되어지고 있다. 도처에서 흉악한 범죄가 종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단군 이래로 가장 고학력의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과학 기술이 최고로 높아진 사회에서, 풍요를 구가하는 첨단의 문화 사회에서, 왜 우리는 이토록 피폐한 삶을 아직도 자습하고 있는 것일까. 고슴도치는 1만6000여 개의 가시가 자신을 보호해 주기 때문에 주위 환경에 무감각한 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자신은 몸을 둥글게 말면 가시에 쌓여 상대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지만, 그 가시가 주위 동물들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과 상처를 준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Hedgehog’s dilemma).

타인에 대해서는 그토록 인색하고 옹졸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그리도 관대한 우리의 이기적 관습이 어느덧 상존적 사회 통념으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타자에 대한 정죄와 분노는 여과 없이 분출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왜 그리 비겁한 침묵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은폐된 자존심의 발로라면 너무도 얄팍한 헤아림이 아닐까. 그게 염치없는 양심의 발로라면 너무도 민망한 눈가림이 아닐까. 때로는 관용과 용서가 아닌 처절한 자기성찰과 통절한 비판의 깨달음으로(然後知) 개인과 공동체를 위한 자양분(滋養分)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Aristoteles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젠 성경말씀만이 유일한 정답이라며 기교 있게 쏟아내는 강단의 도식에 결코 세상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 방울의 물에도 하늘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음을 알자(然後知). 구원이 결코 크고 화려한 성전에 있지 않음을 알고, 맘몬이 판치는 시대에도, 성물에 돈을 입히지 아니하고, 빛바랜 성경을 만나로 씹고 있는 거룩한 지도자가 그리운 시대다. 사람들 위에 우쭐대는 가시나무들과 벗 삼지 말고(삿9:15) 함몰하는 강단에 역청을 발라(창6:14) 폭풍이 대작하는 바다에서도 나의 연고임을 내가 아는(욘1:12) 연후지(然後知)를 되새겨보자.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비우고 내려놓고 멈추면 보이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덩달아 포켓몬고(Pokemon Go)를 따라 사람들 사이를 누비지 말고, 신령한 말씀 사이에 이는 성령의 파도에 연후지(然後知)의 서핑(surfing)을 즐겨보자. 복음은 매임이고 누림이고 쉼이다(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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