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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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6.02.24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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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을 향한 애타는 마음, 시(詩)로 승화시킨 민족시인 윤동주·박두진·김현승

3.1절 기획 // 나라를 사랑한 민족시인을 찾아서

사랑하면 시인이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랑에 빠지면 못 보던 것이 보이고, 안 들리던 것이 들리고, 못 맡던 냄새를 맡게 된다. 같은 아픔도 오감(五感)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 시인의 숙명이다. 나라를 사랑한 시인들도 그랬다. 일제강점기 민족적 울분의 때에 시인들은 누구보다 민족적 아픔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오는 3월 1일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궐기해 평화적 시위를 벌인 날이다.

일제강점기 민족적 고난의 시기를 지나며 많은 기성 문인들이 변절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고 시를 써내려간 시인들이 있다. 누군가는 글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폄하하지만 문인들에게 있어 ‘글’은 가장 적극적인 표현 방법이자 민족 해방을 향한 뜨거운 열망의 표출이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말살하기 위해 문인들을 말할 수 없이 박해했던 시대적 상황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본지는 3.1절을 맞아 나라를 잃은 슬픔을 시로 승화시키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민족 해방의 열망을 표출했던 기독교 시인들의 삶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서시의 육필원고.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지난 16일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고 불리는 청년 윤동주의 서거 71주기였다. 최근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다룬 영화 ‘동주’가 개봉했는데 규모가 작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흥행률을 보이고 있어 윤동주를 향한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 윤동주 시인(1917~1945).

윤동주의 시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가혹한 시대적 현실에 대한 고뇌와 처절한 몸부림을 그만의 투명하고 순수한 영혼의 목소리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서시’는 일제 탄압에 신음하던 시민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 시로,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다.

윤동주의 시는 결코 어렵거나 난해하지 않다. 그는 비참한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시인으로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했고, 그러한 처절한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그는 ‘부끄러움의 미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확립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는 크게 두 가지 사상에 기초해 있는데 하나는 우리 민족에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며,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이다. 서시, 참회록, 십자가 등을 비롯한 많은 그의 시 배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사랑과 희생정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십자가’는 속죄양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민족을 구원하고 싶다는 시인의 간절한 열망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일제의 식민정책이 한층 강화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창씨개명을 강요해 더욱 암울했던 1941년에 창작된 시로 그 의미가 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윤동주는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수감돼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이었다. 그 후 3년 뒤, 정음사에서 윤동주의 작품 30편을 모아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간행하게 된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젊은 시인은 별이 바람에 스치듯 사라지고 말았지만,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사랑과 용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그의 주옥같은 시들은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윤동주의 시가 일제강점기 내적 성찰이라는 소극적 저항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에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응교 교수(숙명여대)는 “윤동주 시는 자기성찰에 머물지 않고 나아가 사회를 변혁하는 데에 이르고 있다”며, “철저한 자기성찰로부터 출발해 궁극적으로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적극적 자세를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청록파 시인 혜산(兮山) 박두진

“하나님이여, 내게 만일 조그만치라도 시를 쓸 소질을 주셨거든 이 길을 걸어감이 내 명예와 만족만을 위하는 것이 되지 말게 하시고, 오직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일로써 유일한 목적을 삼고 그렇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박두진 시인(1913~1998).

박두진의 문학적 틀은 바로 생명력 있는 자연이었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기쁨을 기독교적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존재 의미를 추구하는 시를 썼다. 그의 기독교 세계관은 대부분의 시에서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는 것도 신의 영광을 위해 써야했고, 인류는 궁극적으로 신의 사랑의 섭리 아래 하나로 완성된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18세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박두진은 죽을 때까지 청교도적인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으며, 이를 시로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에 몸부림 쳤다.

특히 그의 시는 ‘자연·인간·신’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자연은 인간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일종의 ‘메시아’적 상징이자, 이상적 존재로 표현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자연과 세계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이 친히 창조한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고, 재창조했다. 또 ‘믿음·소망·사랑’의 성격적 정신을 그의 작품 세계에 함축해 담았으며, 예수그리스도의 행적과 함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견하기 위해 애썼다.

박두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과 독재정권 등의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며 지성과 양심의 목소리를 잃지 않은 지사적 면모를 보였다.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시인이 공동간행한 <청록집>(1946)의 시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에 씌어졌다. 청

록파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인간의 염원과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공통된 소재로 ‘자연’을 활용했으며, 빼앗긴 땅과 자연을 복원시켜 그 속에서 파괴된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찾고자 했다. 일제 말 국어말살정책이 극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된 <청록집>의 발간은 일제의 굴욕을 극복하려는 불굴의 의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박두진은 기독교적 생명 사상에 입각해 자연과의 친화를 노래했는데, 초기 시는 현실의 고통을 참고 메시아가 올 것을 믿고 기다리는 자의 환희를 힘 있게 표현했다. 그 메시아는 8.15광복과 함께 도래하며 ‘해’로 표상된다.

시집 <해>는 한국시사상 유래 없이 맑고 희망적인 노래로 가득 차 있다. 환희의 감정을 절제하지 않고 발신하는 특유의 유장한 산문시의 리듬은 풍요로운 자연의 이미지와 독창적인 상징어들과 어울려 건강하고 활력에 넘치는 세계를 보여준다.

시기적으로 박두진의 시 세계는 해방과 6.25를 분기점으로, 민족의 구원에 대한 소명 의식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됐으며, 기독교적 종말관이나 신앙적 갈구는 후기에 두드러졌다. 그는 1937년 ‘문장’지에 ‘묘지송’ ‘향현’을 발표한 이래 60여 년간 활동하며 한국현대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한 시인, 김현승

시인 박두진은 김현승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가장 고도한 정신을 가장 순수한 정신으로, 가장 순순한 정신을 가장 인간적인 것에 둔 김현승 시인은 기독교적 시 정신에 바탕한 현대시의 서정성을 획득하고 구축한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밝힌 바 있다.

▲ 김현승 시인(1913~1975).

‘가을의 기도’로 익히 알려진 김현승 시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시를 썼으며,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거나 내면화한 시들을 써내려갔다. 한일합병 직후 목사의 아들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기독교를 소재로 하거나 내면화한 시들을 써내려갔다.

그의 성품은 늘 의로움을 추구하며 자신에게 엄격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1936년 숭실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1937년 일본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양심상 도저히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꺾고 절필했으며, 광복 후 1949년 다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초기에는 자연의 예찬을 통한 낭만주의적 서정시의 경향을 띠었다. 대표적인 시가 ‘가을의 기도’로, 가을의 계절감을 그리며 경건한 삶의 가치를 노래한 시다. 8·15 광복 후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경건한 삶의 가치를 추구했으며, 말기에는 고독과 구원 등 인간의 본질을 노래하게 된다.

이 시기 대표적인 시는 ‘눈물’로서 어린 아들을 잃고, 그 슬픔을 기독교 신앙으로 극복한 내용을 담았다. 현상적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이 청교도적 윤리관 속에서 발전됐다면, 그의 존재 성찰의 문제 역시 기독교적 초월의식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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