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됨’ 보여준 손양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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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됨’ 보여준 손양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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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10.0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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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아 교수 / 성균관대학교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거두실 때에는 “죽음이 끝이 아닌 시작이며, 패배가 아닌 승리이고, 실패가 아닌 성공이며, 돌발사고가 아닌 그분의 계획과 섭리가 된다.
그래서 그랬는지 손양원 목사가 순교하는 날 서울수복이 이루어져 이 땅이 온전히 공산주의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 막아졌으며, 그에게서는 막내아들 동길이가 태어난 후에 대한신학교를 졸업하여 필리핀 선교사로 나가 있으니, 그의 순교로 ‘민족의 구원’과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이 되고 손양원 목사가 순교한 지 65년이 지나도록 그의 죽음이 “이 땅의 시련을 마치는 졸업” 즉 ‘민족의 분열을 통일로 승화’시키고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일까? 특히, 그의 삶이 남북통합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첫째, 그는 ‘이념분쟁’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오직 하나님만 제대로 믿고 그의 말씀만, 시대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전할 뿐이었다.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좋다 혹은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가 문제가 아니라,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마태복음 7:3)를 보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통일이 안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신사참배·친일·이념논쟁을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아직도 ‘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가 ‘좌익’이라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를 아들로 삼을 정도로 ‘참 사랑’을 베풀어, ‘참된 용서’를 보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을 ‘원수’로 여기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누가복음 6:27-28)고 하셨는데, 전쟁을 일으킨 북한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면 일제 치하에서는 어떻게 청년학도들을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내몰았냐고 되묻고 싶다. 우리가 북한을 ‘이웃’으로 여기고 그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마가복음 12:31)하기 전에는 이 나라에 통일이 주어지지 않을 것 같다.

셋째, 그는 언제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길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가 회복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이란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 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 사랑에는 언제나 ‘희생’이 요구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우리가 북한주민을 위해서 진정으로 무엇인가 희생을 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는 ‘통일’보다 더 귀한 ‘민족의 통합’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 김구 선생은 서울에 올라와 학교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돌보아야 할 ‘식구들’, 즉 애양원 나환자들이 많다며 이를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1949년 “서울신문” 칼럼에 다음과 글을 남기게 된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다. … 이 땅의 정치가들에게도 손 목사와 같은 아량과 포용성과 수완이 있다면 남북통일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처럼 ‘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보여준 사람이 손양원 목사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십자가 사랑’으로, ‘교회의 통합’과 ‘민족의 통합’을 이루며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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