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아픔… 상처 속에서도 장로교 역사는 묵묵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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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아픔… 상처 속에서도 장로교 역사는 묵묵히 흐른다
  • 이인창, 손동준, 정하라 기자
  • 승인 2015.09.16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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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 총회 100년 역사적 장면들

100회 총회에 돌아본 한국장로교의 역사

한국교회 최대 교파로 성장한 장로교

굴곡진 흐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 찾아가

 

1912년~1948년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

1903년 원산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불길이 1907년 평양으로 점화되면서, 전국 방방곡곡 부흥의 불길이 번졌다. 또 1909~1910년 사이에 일어난 백만인구령운동은 일제 강제병합에 따른 저항의식을 약화시켰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부흥운동과 함께 각 교파들의 연합운동이 진행되도록 영향을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1912년 9월 2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신학교에서 창립됐다. 1887년 새문안교회에서 장로회 최초의 조직으로 당회가 결성되고, 1907년 독노회가 결성된 이후 또 한단계 도약을 이룬 순간이었다.

당시 창립총회에는 7개 노회의 총대들이 참석했으며, 총대수는 목사가 96명 장로가 125명이었다. 그리고 초대 총회장에는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가 선임됐다. 또 한국인 부총회장으로는 길선주 목사가 추대됐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은 당회,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장로교회 조직을 한국교회가 완전히 갖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27회 신사참배 결의, 그리고 해제 결의

일제의 침략으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비운의 역사는 한국 장로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민족운동,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 등에 있어 기독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때문에 교회는 끊임없는 박해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저항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했다.

총회 전부터 전국적으로 총회 대의원들을 위협하고, 총회 석상에 경찰이 배석하는 등 일제는 조직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가 우상숭배를 정기총회에서 결의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후 1946년 6월 열렸던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다시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다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참회기도회를 드렸다. 하지만, 신사참배 결의로 인한 파장이 해방 후로까지 이어져 교단 분열의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오명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 장로교 총회 잃어버린 3년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창립됐다면, 올해 2015년 장로교단 총회 회기는 제103주년이어야 한다. 하지만 예장통합과 합동, 기장 등 장로교단들의 정기총회 회기는 100주년으로 표기됐다. 이유가 무엇일까?

일제는 패망을 앞두고 조선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통치를 전개하면서, 급기야 1942년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를 강제해산하기에 이른다. 이후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만들어졌고, 1945년 7월 19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새롭게 조직하고 여기에 장로교뿐 아니라 감리회, 구세군 등 교단들을 통합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8.15 해방을 맞았고, 직후인 1945년 9월 8일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해산하고 장로교와 감리회가 함께 ‘남부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46년 6월 12일 남한만의 총회라는 의미에서 ‘남부총회’를 개최하고 제32회 총회 역사를 기록하게 됐다. 마침내 1943~1945년 사이 사라진 3년의 역사를 극복하고 1947년 3월 18일 제33회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1949년~1980년

자유주의 신학논쟁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은 우리나라 신학 역사에서 오랜 논란으로 존재해왔으며, 장로교 분열에도 큰 원인이 됐다. 한국교회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 논쟁에 불을 지폈던 물은 김재준 목사다. 1930년대 한국 장로교는 박형룡 목사와 평양신학교를 중심으로 성경무오설과 축자영감설에 근거한 정통 보수신학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재준 목사는 토착화된 자유주의 기독교를 추구하며 축자영감설을 거부하고 신정통주의를 받아들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많은 인사들이 투옥되던 1940년에는 자유주의 신학 배경의 목사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신학교를 개교하고 김재준 목사가 교수로 취임했다. 조선신학교의 성서해석학은 당시 보수적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와 신학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52년 제37차 총회에서는 김재준 목사를 면직 처분하고 조선신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의한다. 이후 김 목사를 지지하는 인사들이 1953년 새 총회(현 한국기독교장로회)를 결성했으며, 자유주의 사상은 한국교회의 교단과 강단을 통해 크게 영향력을 넓혀 나가게 됐다.

 

합동과 통합의 분열

한국 장로교의 가장 큰 분열은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라고 할 수 있다. 분열의 직접적 원인으로는 박형룡의 선교비 3천만환 공금 유용사건과 WCC 탈퇴를 둘러싼 입장 차이를 들 수 있다.

당시 한국 장로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진보적 성향의 지도자와 세계복음주의친교회(NAE)에 참여하는 보수적 성향의 지도자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보이지 않는 대립과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마침 당시 총회신학교 교장이었던 박형룡이 학교 부지구입을 위한 공금 3천만환을 사기당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는 WCC와 NAE 지지측의 대립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이에 WCC 지지측은 박형룡의 인책 면직을 주장했고, 당시 NAE운동의 고문이었던 박형룡을 구명하기 위해 NAE는 “WCC는 용공이요 신신학이요 단일교회를 지향한다”고 악선전하면서 박형룡의 인책을 회피하고자 했다. 결국 1959년 48차 총회에서 장로교는 WCC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갈라지게 되고 이것이 통합과 합동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장로교 이단 결의

한국교회 역사상 큰 특이점 중 하나는 사이비 이단의 발흥이다. 역사적으로는 1950년대 한국전쟁 후 혼돈하고 불안한 사회 격변기를 틈타 신비적이고 초자연적 현상을 추구하는 은사집회와 함께 각종 이단이 극성을 부렸다. 특히 이 시기에는 박태선의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전도관), 동방교(기독교대한개혁장로회), 문선명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등 오늘날 이단시되는 개신교계 소종파의 원류들이 대거 출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 사이비의 발흥은 이단에 대한 분명한 지침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55년 한국기독교연합회는 통일교와 박태선의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이라며, “통일교는 제3의 경전을 창작하고 가정과 사회의 윤리도덕을 파손시키는 사교이며, 전도관은 신앙 도리에 합치되지 않는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후 장로교 총회는 교리적으로 직접 계시에 대한 주장은 탈선의 우려가 있으며 예배는 엄숙, 경건하게 드려야 하고 신앙은 복음을 전파하며 생명을 구하는 것이 목적으로 헌금과 박수와 신유에 치중하지 말 것을 각 노회에 지침으로 제시했다.

 

1980년~현재

여성목사 안수 법제화

1995년 대형교단으로 손꼽히는 예장 통합이 제80회 총회를 맞아 여성목사 안수를 법제화 한다. 이미 70년대에 기장, 80년대에 감리교가 여성목사 안수를 시작했지만 교세를 감안했을 때 통합의 여성목사 안수 법제화는 본격적인 여성목사 시대를 여는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특히 1996년 81회 총회를 앞두고 진행된 목사고시에서는 77명의 여성 합격자가 배출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2011년 예장 백석도 여성목사 안수를 통과시키면서 이 대열에 동참한다.

여성목사 안수 법제화는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중심으로 하는 평신도 운동의 본격적인 활성화 계기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통합의 여성목사 안수 법제화 20년이 흐른 지금, 총회 현장의 여성총대 수는 전체의 10퍼센트 수준에 그치고 있고, 장로교 양대 교단으로 꼽히는 합동의 경우 여성목사 안수가 여전히 요원한 상황이다. 교회 내 여성의 비중을 생각할 때, 여성 총대권 확충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4개 장로교단 연합예배

2008년 가을 예장 합동과 통합, 합신, 기장 교단은 제주도에서 동시에 제93회 총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제주도 일대에서 총회를 개최하고 3일째인 수요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장로교 연합 감사예배를 함께 드렸다.

총회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수준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교단 내 주요 목사와 장로가 총출동하는 명실상부한 교단 최대 행사인 총회 도중에 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매우 깊었다. 당시 기장 부총회장이던 이덕기 장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반목과 질시, 서로를 세우기보다 나 자신만의 주장만 앞세웠다”며 남긴 회개 기도는 당시 많은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2015년 장로교단 통합 움직임 본격화?

분열을 거듭하던 장로교단이 본격적인 통합 행보에 시동을 걸었다. 올해 65번째 총회를 맞이한 예장고신은 1976년 분열됐던 예장고려측과 통합을 결의했다. 고신총회의 470여 총대들은 “고신총회와 고려총회의 통합은 성경적·한국교회사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통추위의 통합결의문 수용안을 가결했다.

양교단은 통합을 통해 2113개 교회 55만 성도 규모의 중대형 교단으로 발돋움 했다.

그런가하면 예장백석과 대신은 지난 14일 경기도 화성 라비돌리조트에서 통합총회를 열고 역사적인 통합을 마무리 지었다. 양 교단은 처음으로 협상을 시작한지 17년만에 통합을 완수하고, 7천여교회가 소속된 한국교회 세번째 대형교단으로 거듭났다. 통합총회는 이름을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으로 정하고 통합총회장으로 장종현 목사를 추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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