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시작된 장로교단, 100년만에 180개로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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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시작된 장로교단, 100년만에 180개로 분열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5.09.0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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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총회 맞아 돌아본 한국교회 분열사(상)

장로교 교단 총회가 오는 9월 14일 예장 합동과 통합을 필두로 100회 총회가 일제히 개최된다.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첫 총회가 열린지 올해로 설립 103년, 회기로는 100회를 맞이한다. 대부분의 장로교단이 대한예수교장로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만 교단과 교파로 갈라진 한국교회는 “하나 됨”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야 하는 교회 본연의 정신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지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개신교회는 232개 교단에 이르고, 이 중 장로교 교단은 180곳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마저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면서 ‘분열’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신학적인 노선과 이념의 차이로 인한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공동된 의제 앞에서도 하나로 ‘연합’하지 못하는 현 한국교회의 실정은 안타까움을 가져다준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총회를 앞두고 본지는 한국 장로교 교단의 분열사를 회고하는 한편 100회 총회는 맞는 한국교회의 과제를 짚어내고자 한다.

#고난 속에 피어난 ‘한국교회’

이 땅에 장로교가 싹트게 된 것은 1885년,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가 한국 최초의 목회 선교사인 언더우드를 파송하면서 부터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의료·교육·문화에 걸친 다방면의 노력으로 당시 동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한국에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시작됐다.

특히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과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해에는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 7명을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를 창립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하지만 1910년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면서 대한(大韓)이라는 국호 대신 조선(朝鮮)을 사용하며, 민족적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각 지방 교인들의 헌신적인 전도운동을 통해 교회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7개 지방 대리회의 조직을 장로회 정치 조직에 따라 노회로 개편하게 된다.

이렇게 전국에 7개 노회가 조직되면서 1912년 9월 1일 221명의 총대가 평양장로회신학교 강당에 모여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를 갖고 매년 지방을 순회하면서 총회가 개회됐다. 또 하나 의미 있는 사건은 1912년 총회가 창설된 동시에 해외선교에 관심을 갖고 중국에 선교사 3명(박태로, 사병순, 김영훈)을 파송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구국일념으로 똘똘 뭉친 지역교회는 교회 목사가 민족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을 단결하게 했고, ‘진흥운동’을 통해 지역이나 교회의 부흥집회 형태로 한국교회 부흥을 이끌었다. 3.1독립운동 직후 1919년 제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진흥부’를 설치하고 부흥회와 단체전도, 사경회를 열었고 각 노회도 ‘부흥부’를 상설 부서로 설치했다. 이 결과 조선 교회는 폭발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1920년대 후반 일본이 병참기지화 식민지정책으로 우리나라 농산물과 농촌의 노동력을 착취하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28년 제17회 총회에서 전국 20개 노회에 ‘농촌부’를 설치하고 농촌의 영과 육을 구원하는 ‘농촌선교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천황의 숭배를 거부했던 기독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1942년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31회 총회’를 끝으로 강제 해산됐으며, 이에 따라 1943~1945년엔 총회가 열리지 않았다.

#한국교회 분열의 시작 ‘신사참배’

한국교회 최초의 분열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에서 시작됐다. 일본은 헌법에서 국가 제사의 대권자이자 현신인 천황은 누구든지 침해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일본 천황을 섬기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숭실학교 등 10여개 미션스쿨이 강제 또는 자진 폐교하게 됐다. 그러나 민족운동의 보루였던 교회조차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분열, 회유 공작에 못 이겨 1938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많은 교회가 신사참배는 일본의 국가의식이라며 적극적으로 참여한 반면, 신사참배를 철저한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반대했던 인사들은 순교까지 불사하며 반대운동을 펼쳤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소위 ‘재건파’들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신사참배 했던 기성 교회 및 목사와 결별하고 단독교회를 설립했으며 한상동, 박윤선, 주남선, 손양원 목사를 중심으로 1946년 9월 고려신학교를 정식 개교했다. 그러나 총회가 이를 인정하지 않자 이들은 노회를 탈퇴해 새로운 노회인 ‘고려파(현 예장 고신)’를 조직, 1952년 9월 고려파 장로교회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 장로교 최초의 분열이 시작된 것이다. 장로교 주류인사들은 신사참배 출옥자들을 단죄했고 출옥자들 역시 이들을 정죄하면서 결국,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예장 고신파’로 분립을 선언하고 1952년 9월 고려파 장로교회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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