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적 용어로 '도전(挑戰)'이란 말 사용은 부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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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적 용어로 '도전(挑戰)'이란 말 사용은 부적합하다
  • 승인 2003.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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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목회자들이나 일반성도들까지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설교 때나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받게 하여 주옵소서”라든가 “설교에 도전받았다”던가 “00의 기도에 도전받았다”던가 “00의 간증에 도전 받았다”와 “말씀에 도전받기를 바랍니다”라는 투와 관련하여 도전 받았다는 말을 흔히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적절하지 않는 사용이다.

도전(挑戰)의 뜻은 “싸움을 걸거나 돋움”을 뜻하거나 “보다 나은 수준에 승부를 걺”을 뜻하고 비유적으로 응용하는 뜻으로는 “어려운 사업이 기록 갱신(更新)에 맞섬”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러한 뜻을 가진 말을 설교에서 충격적인 감흥을 받았거나, 전에 깨닫지 못한 점을 깨우침을 받았거나, 그 설교를 계기로 어떤 새로운 결심과 다짐을 하게 되었거나, 실의와 낙담 중에 새로운 소망에로 정신적 계기를 맞게 된 영향력을 도전으로 표현하는 것 같으나 부적절한 용어의 도입이다.

도전이란 말의 상식적인 쓰임새는 첫째, 전쟁과 어떤 결투(決鬪)를 통한 승부(勝負)또는 승패를 가름 짓기 위해 쌍방이 합의를 하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상대를 공격하게 될 경우를 두고 쓰는 말이며 둘째, 이 도전은 하급수가 상급수를 향해 지위 격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경쟁을 걸거나 싸움에 임하는 경우와, 상급수가 하급수로부터 상위 탈환을 위해 싸움(전쟁)을 걸어옴을 받아들이는 경우를 두고 “도전 받는다” “도전 받았다”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 용법이 일반적인 언어문화 감정에 이미 교착(膠着)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전’이라는 용어는 인상적으로 호전성(好戰性)을 나타내는 말로서 신앙이나 영적 정황에 도입하기는 너무나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말씀과 성령님의 사역적 영력이 그의 백성 된 성도에게 어찌 도전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상위(上位)적 지위에서 하위(下位)적인 지위의 계층을 대상으로 도전은 될 수 없다.

“도전(挑戰) 받았다”든지 “도전 받는다”든지는 하수가 상수 또는 하위 층이 상위 층에게 지위나 신분 상승을 위하고 국가간이라면 승리의 목적으로 도전을 하고 도전을 받을 수 있으나 어찌 절대적 가치를 지닌 진리와 신(神)적 권위를 가진 말씀이 선언적 교훈일 뿐이지 죄인 된 인간에게 ‘도전’ 할 수 있겠는가?

상호 대립적 관계와 경쟁적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며 신령한 아버지와 그의 자녀의 관계에서 도전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다만 성도는 사탄과 마귀의 도전을 받고 숱한 유혹을 받지만 진리로부터 성령님의 교통하심의 관계에서 도전을 받을 수는 없다. 진리와 말씀 앞에서, 성령님의 역사 앞에서, 교훈 받고 일깨움을 받고 인도와 감동을 받을지언정 도전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에서 또한 말씀과 그 말씀을 받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도전’이라는 말 사용한 사례가 없는 것이다. 지나친 감성주의와 광기어린 열정이 본의 아니게 호전적 용어를 여과 없이, 검증이 없이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사용한 듯 하나 시정되어야 한다.

‘도전’이라고 쓸 수 있는 고조된 영성이라면 “큰 감격과 감명을 받았다”든지 “성령님의 영력에 압도되어 새로운 변화를 받았다”든지 “큰 깨달음을 통한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성적 상태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내용 없는 열정주의의 산물이라고 보고 싶은 이 ‘도전’은 언제나 지고한 가치를 지녀 인간보다 더 크고 더 높은 지위에서 그렇지 않는 인간에게 ‘도전’이나 하는 수준으로 영적 작용을 표현하는 것은 지금부터라도 시정되어야 한다. 부적절한 ‘도전’의 용법을 시정하기를 진정 도전(挑戰)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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