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한다,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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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한다,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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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7.0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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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생각보다 조용히 6월 25일이 지났다. 요즘 교계는 동성애 반대집회니, 자기반성의 회초리 집회니, 통일 기도회니 하는 목소리 큰 집회들로 소란하다. 그런데 이 날을 기억하는 행사 소식은 크게 듣지 못했으니 조용히 지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날은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으로서도 결코 그냥 지나서는 안 되는 날이다.


1951년 6월 25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한때 6·25동란, 6·25사변으로 불렸다. ‘난’이나 ‘사변’은 전쟁을 ‘반란’으로 규정하거나 전쟁 상대를 경멸할 때 쓰는 용어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이 전쟁은 6·25전쟁, 한국전쟁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용어의 변화에는 남북을 포함한 국제 정세의 변동, 역사적 인식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한국전쟁’은 단지 “북한 괴뢰정권의 도발”이거나, 남북 사이의 ‘내전’이 아니다. 미국이 중심이 된 16개국 유엔군과, 이에 맞서 중공군과 소련군이 참전한 대규모 ‘국제 전쟁’이다. 미, 영, 중, 소 등 당대의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격돌했다. 엄청난 양의 화기가 사용되었고, 수백만의 전사자가 생겼으며, 대규모 폭격으로 산업시설, 주거시설이 폐허가 되었고, 온 산과 들이 다 파헤쳐진 참혹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소재로 삼은 미술작품이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가 그린 ‘한국의 학살’이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만, ‘한국의 학살’을 아는 이는 상대적으로 적다. 피카소는 1951년에, 한국전쟁의 참혹한 학살 소식에 경악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는 비무장, 맨몸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떨고 있는데, 그들을 겨눈 총부리는 그들의 숫자보다 더 많다. 민간인 학살의 비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한반도는 군사력이 충돌하는 ‘전장’이면서 동시에 민간인 학살의 ‘현장’이었다. 전쟁 동안에 학살된 민간인 수가 100만 명을 넘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수도 서울을 지킬 것이니 동요하지 말라고 방송하면서, 몰래 서울을 빠져나간 뒤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북한군의 수중에 남겨진 서울시민들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했겠는가? 서울만 아니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국토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점령군이 수시로 바뀌었고, 바뀔 때마다 주민들은 점령군에 동조했다거나, 부역했다는 등의 이유로 재판도 없이 끌려가 처형당했다.
미군에 의한 피난민 학살도 적지 않았다. 학살에는 남한군도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주민들 사이에도 원한이 쌓여갔다. 점령군이 바뀌면 서로를 빨갱이로, 반동분자로 몰았다. 신앙인들도 이 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독교는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였지만 가해자이기도 했다. 이 학살은 휴전 뒤에도 이어졌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연좌제 아래서 숨죽이고 살았다. 대립, 분노, 살해, 원한 이것이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이다. 거기에 용서와 화해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지낸 세월이 올해로 65년이다. 올해가 분단 70년이라고 신앙인들은 통일을 염원하고 기도하며 집회를 연다. 하지만 분단과 통일을 말하면서, 이 전쟁을 지나칠 수는 없다.


그래서 6월 25일을 우리는 아프게 기억해야 한다. 국가안보만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도 이 날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의 목숨이 종잇장보다 가벼웠던 때를, 무수한 젊은이들의 피와 꿈이 이 산하에 스러져 묻히던 때를 기억해야 한다. 라헬처럼 아들을 잃은 부모의 통곡소리를,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이웃끼리 서로를 살육으로 내몬 비극을 기억해하고 참회해야 한다. 기억하는 자만이 과거의 재연을, 그 비극의 반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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