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아라랏 산 정상,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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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아라랏 산 정상, 그러나…"
  • 승인 2003.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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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24일, 이 날은 필자의 생애에 있어서 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뜻깊은 날이다. 그 이유는 이 날 그토록 올라가고 싶어했지만 오르기가 “매우 고통스럽다”(Agri dagi)는 아라랏 산을 기어코 올라간 날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고대 전승에 따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갔다가 내려온 금요일을 거룩한 날로 기념하고 있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을 성 금요일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공통적인 것은 금요일은 산 혹은 언덕 위에서 고통스러운 주요 사건이 일어났었던 역사적인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금요일에 산을 오르게 된 것은 우연의 범주를 넘어선 필연적인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섭리적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밤새도록 몸이 얼어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쳤던 탓인지 몸은 극심한 고산 증세까지 겹쳐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휘청거렸다.

그러나 노아의 산 아라랏은 여전히 그 웅장하고 늠름한 모습으로 산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을 조용히 굽어다보고 있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지만 눈 위에 무릎을 꿇고 잠시동안 기도를 드리고 난 후 시편 121편을 히브리 원문으로 크게 낭송하였다.

“에싸 에나이 엘 헤아림 메 아인 야보 에에즈리…”(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영감에 찬 계시의 노래는 차디찬 아침 공기를 가르면서 아라랏 골짜기 너머로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선채로 쿠르드식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후 두 셀파와 함께 아라랏 산 정상을 향해 출발하였다. 네 명의 포터는 우리 일행이 하산할 때까지 텐트 안에 머물러 있기로 하였다.

산 정상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어 있었지만 산 중턱에는 회색 빛 구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도저히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다리는 어디에서 힘이 솟아 나왔는지 두 셀파가 앞서 밟고 간 눈 자국을 따라 부지런히 뒤좇아가게 하였다.

2시간 여를 걸었을까 앞 쪽에 깍아 지른 듯한 절벽과 왼쪽으로 가파른 4,200m 능선이 성벽 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으나 희미하게 불빛만 보일 뿐 사진은 찍혀지지 않았다. 예비로 가져간 카메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메라의 밧데리가 영하 30도 이하에서 얼어버리는 줄을 왕 초보 등산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산악의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심하게 나타났던 고산 증세도 많이 가라앉았다. 눈부신 햇살 사이로 산 주변을 한번 쭉 둘러 보았다. 저 멀리 남동쪽에는 흰 눈에 쌓인 몇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 중에 소 아라랏산(Kucuk Agri, 3896m)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홍수 후 물이 빠질 때 대 아라랏 정상에 놓여져 있던 노아의 방주는 속칭 “영웅들의 침대”에 부딪치면서 “노아의 방주터” 라는 곳에 안착하게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주 비행사 어윈이 이 사실을 우주선에서 확인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전 세계로부터 관광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있는 실정이다. 사실상 아라랏산에서 노아 방주의 흔적을 찾아보려는 인간의 끈질긴 집념은 지금까지 이 산을 수없이 많이 오르게 했다.

주전 3세기 베로수스라는 성직자는 알메니아인들이 바벨론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방주의 위치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배들을 만져 보았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1829년에는 독일의 파로트가 최초로 산 정상을 올랐는가 하면, 1887년에는 인도 남부에 있는 네스토리안 교회 수장이었던 아르치다콘 누리가 아라랏산에서 선체의 반이 눈으로 뒤 덮혀 있는 배(길이 274m, 높이 30.4m)를 발견했고 그 위에 직접 올라가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1955년에는 프랑스의 기업가 페르난드 나바라가 3,962m에 있는 얼음 층에서 방주 조각을 발견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드디어 필자는 파라슈트씨와 메멧 두 셀파와 함께 만년설에 뒤덮힌 빙하의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끄러운 수직 빙벽으로만 생각했던 절벽은 눈이 얼어붙어 이루어진 자연산 벽면이었다. 손과 발로 여러 차례 긁고 차면 홈이 패어져 간신히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장비가 없어도 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했던 파라슈트씨의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홈이 미끄러지거나 발이 꺼질 때면 밑으로 내려오기도 했고 위에서 돌이나 눈덩이가 굴러 올 때에는 등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더욱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파른 낭떠러지 벼랑은 오금까지 저리게 할만큼 위험스럽게 보여졌다.

다행히 중간 부분에 바윗돌이나 완만한 경사지가 있어서 잠시동안이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 셀파는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올라가야만 한다고 손짓으로 재촉하였다.

또 다시 피를 말리는 산행이 계속되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 올라선 언덕, 거기에는 노아의 방주가 40일 동안 떠돌다 잠시 머물었다는 평평한 고원 지대가 멍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때가 오후 1시 47분, 두 번째 캠프를 떠난 지 6시간 여만의 일이었다.

저 멀리 먼 동북편에는 카스피해인 듯한 푸른 지평선이 희미하게 떠 있었고 남동쪽에는 이란의 우르미아 호수, 남쪽에는 이락의 드넓은 평야가 시원스럽게 한 눈에 들어왔다.

주여! 라고 큰소리로 외쳤더니 태고의 적막이 깨어지면서 아라랏산의 메아리로 사방에 흩어져 갔다. 산 정상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고 얕은 오르막 산은 갈길 바쁜 순례자의 발걸음을 더욱 서두르게 만들었다.

그 살인적인 추위와 창자까지 쓰리게 하는 배고픔, 감각까지 모두 마비되어버린 듯한 피곤한 몸, 그러나 그것이 이미 불덩이가 되어버린 뜨거운 심장의 고동과 거친 숨결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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