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祈福)적 말씀선언으로 강요된 '아멘' 반응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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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祈福)적 말씀선언으로 강요된 '아멘' 반응 옳지 않다
  • 승인 2003.05.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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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보 2002년 7월28일자 제695호지 11면에 35회째 기고문에서 “강요된 아멘” 옳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으나 “아멘”의 남발이 심각한 단계에 있음을 재론코자 다른 관점에 재차 논급코자 한다.

이 “아멘”의 어원을 보면 히브리어로는 wme a: 으로, 헬라어로는 αμην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확고하다”, “후원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말이 신약에서는 “그렇게 될 지어다”라는 감탄사로 사용되었는데 주로 다른 사람의 메시지나 명령에 동의할 때 “아멘”이라 반응하였다. 예컨대 “솔로몬이 왕이 되리라”는 다윗의 선포에 대하여 <브나야>는 자신의 동의와 확신을 표시하였다(왕상1:36).

<예레미야>도 <하나야>의 올바른 예언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였다(렘28:6). 이 외에도 “언약 성취의 확신으로 화답한 아멘”(렘11:5)과 “율법낭독에 대한 백성들의 동의”(느5:13, 신27:15-26)등을 나타낼 때 “아멘”으로 화답하였으며 또한 “예배시에 송영(頌詠)”으로 회중이 응답할 때(대상16:36, 느8:6)와 “시편의 끝맺음 말로”(시편106:48)에도 “아멘”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약의 경우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진실로”, “참으로”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지도자의 말”에 동의하는 경우(고전14:16),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믿을 때”(고후1:20), “예언에 동의할 때”(계1:7, 22:20)등에서 “아멘”이 사용되었다.

이런 등의 사례가 성경에 40여 곳에 나타나 있는데 구약의 경우는 총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수종자를 통해 선언될 때 그의 백성들의 진실한 시인과 수용을 화답으로 반응한 사례로 볼 수 있고, 신약의 경우도 하나님의 영광의 송축과 그의 평강과 임재를 선언할 때 화답하는 형식으로 “아멘”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교회의 상당수가 광기(狂氣)에 가까운 반응으로 “아멘”을 맹목적으로 남발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아멘” 그 자체는 하나님과 교감(交感)매체로서 또는 자기신앙의 확증적 고백으로서 매우 가치가 있는 영성적 행위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설교 대목마다, 구절마다, 말끝마다 “아멘”을 유도하고 연발하는 행위는 긍정하기 어렵다.

교인들의 “아멘” 반응의 대부분이 소원성취, 부귀영화, 사업 창대, 입신양명(立身揚名), 자녀출세, 질고치유, 무병장수, 교회의 양적성장, 자손번영, 안일형통 등을 축원하거나 성취를 기원적으로 선언할 때마다 “아멘”이 열광적으로 고조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설교자들이 “아멘”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어투가 문제이다.

아멘이 설교자 자신을 대접하는 조로 화답하거나 설교자의 성취욕구와 만족, 설교에 대한 회중들의 매료(魅了)와 경도(傾倒)를 위해 작위(作爲)적으로 아멘을 강요하는 태도는 수긍할 수 없다. 성경에는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선언 앞에 반사적 반응으로 광기에 찬 아멘의 사례는 물론 없는 것이다.

형식적이고 진실된 내적 동기가 없이 유도(誘導)적 요구에 의해서 반사적 반응으로 아멘을 하는 것이나 유인(誘引)적 선창(先唱)에 대귀(對句)적 화답으로 호응하는 아멘은 설교를 겸손히 수용해야 할 분위기에 공해로 작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고 기복적인 축원의 성취수단으로 아멘을 연발하거나 이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오용이며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진실과 참된 영성적 화답이 아닌 설교의 분위기 고양을 위한 대귀적 아멘은 자중해야 하고 중심을 보시는(마22:16, 삼상16:7, 눅20:21, 행10:34, 갈2:6) 하나님 앞에 내재적 진실을 도모해야 할 것이며 내적 충만한 심령에서 북받침으로 화답하는 고백적인 반응과 진실한 시인으로서 “아멘”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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