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의 눈초리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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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의 눈초리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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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4.2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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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2015년 4월이 지나간다. 이 4월에 기억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있다. 언론에서는 이런 저런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고 재평가한다. 그 일들 가운데에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처형도 있다. 본회퍼가 히틀러 암살모의에 가담한 혐의로 나치정권에 의해 처형당한 달이 4월이고, 올해 2015년은 그로부터 70주기가 되는 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정권의 질주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의 저항은 정치투사로서의 저항이 아니었다. 그의 저항은 신앙인으로서의 저항이었고, 참다운 신앙을 진지하게 모색한 과정이자 결과였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처형으로 기독교는 천재적인 신학자를 잃었지만, 동시에 참 신앙의 사표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4월에 죽은 지 70주기가 되는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김교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독립과 살아 있는 신앙을 추구했고, 그 때문에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일제는 김교신이 주축이 되어 발행하던 '성서조선'을 1942년 폐간시켰다. 그해 3월호의 권두언 '조와'(吊蛙)에서 동면하는 개구리의 소생을 민족의 소생에 비유하였다는 것이 그 구실이었다. 이 일로 일제는 김교신과 함석헌 등 잡지의 동인들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하고, 고정 독자들의 집까지 수색하여 잡지를 모두 찾아내 소각했다.


옥에서 나온 후, 김교신은 1944년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 노무자들을 돕기 위해 함흥질소비료공장에 입사했는데, 이듬해 4월 발진티푸스에 걸린 한국인 환자들을 돌보다 자신도 병에 걸려 사망했다. 광복 4개월 전이었다.


김교신은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주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흔히 그의 무교회주의는 교회를 반대하는 반(反)교회주의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현실의 교회가 참다운 신앙을 가로막는다는 주장이자, 참다운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은 교회제도나 교리나 성례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나님과 신자의 살아 있는 관계는 신자의 전 삶을 지배하는 것이지, 교회당이나 예배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그는 예배와 일상생활의 일치를 철저히 추구했다. 신앙인의 삶 그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한국 기독교의 주류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 흔적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예배가 교회에 국한되어서는 아니 되고,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 한국 기독교를 향한 날선 검이 된다.


모 교회의 장로가 무기상이었다는 뉴스만 해도 평화를 바라는 기독교인으로서는 불편한 소식인데, 그분은 심지어 교회를 비자금 세탁처로 삼았다고 한다. 청와대 전현직 비서실장과 여당 실세들에게 정치자금을 뿌리다 최근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분도 모 교회의 장로였다고 한다. 그분의 삶을 폄하할 생각 없고, 내 부끄러움이 먼저 보이니 쉽게 남을 비판할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일들은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어찌 보면 기독교인인 우리의 일상에는 하나님이 아니 계시거나, 적어도 우리 일상생활은 신앙과는 무관한 것은 아닐까? 일주일에 엿새는 비신앙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살고, 주일날에만 독실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야말로 신앙은 주일날에, 그리고 예배에, 교회당에만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4월의 끝머리에 김교신의 준엄한 눈초리가 나 자신을 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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