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운동과의 관계성에서 경건주의운동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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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운동과의 관계성에서 경건주의운동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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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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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파 경건주의
▲ 조병하 교수

독일의 경건주의역사 기술을 위하여 마르틴 슈미트가 필립 야콥 슈페너에게서 역사 기술을 시작하여 앞서 있었던 영국의 청교도운동과의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루터파 경건주의’)에 비하여 독일의 유명한 경건주의운동의 연구가인 요한네스 발만은 청교도운동과의 관계성에서 경건주의운동을 기술하고 있다. 마르틴 브레히트는 이러한 연구 배경을 반영하여 ‘경건주의 역사: 17. 18세기’를 편집하면서 자신의 글 “필립 야콥 슈페너: 그의 프로그램과 그것의 성과”(6장)에서 루터교 경건주의의 중심인물로 슈페너를 소개하고, ‘독일에서 경건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을 위해처럼 경건주의를 시작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관련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경건주의가 1675년 슈페너의 글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로부터 시작되고 청교도와 연관성 없이 독자적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도, 독일의 일부 개혁파교회와 네델란드지역에서는 유사한 경건운동이 거의 같은 시기에 혹은 보다 일찍 시작됐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같은 책에서 요한 프리드리히 게르하르트 괴터스는 네델란드의 영향을 받아 독일에서 1650-1690년에 있었던 개혁파경건주의를 기술하고 있다. 괴터스는 개혁파경건주의에서 “경건주의자들”이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1698년 개혁파 도시였던 브레멘의 루터교의 작은 신앙공동체의 모임(“중생한 자들의 집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괴터스는 독일에서 개혁파교회의 경건운동들의 시작들은 전적으로 테오도르 운데어아익(1635-1693)의 인품과 그의 활동에 결부됐다고 주장한다. 운데어아익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하나인 프랑크푸르트 사람 하스의 코르넬리우스는 ‘슈페너가 독일교회에서 가졌던 그것을 개혁파교회에서는 운데어아익 가졌다.’라고 1703년에 진술했다. 괴터스는 영국의 청교도사상을 독일에 중재한 자로 피터 스트라이트하겐(1591-1653)을 들고, 그것을 위해 중생에 대하여 쓴 그의 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그러나 주도홍은 개혁파 경건주의자들에게 영국의 청교도 사상을 전해 준 사람으로 윌리엄 퍼긴스(1588-1602)의 제자 윌리엄 에임스(1576-1633)를 들고 있다. 에임스는 1610년 네덜란드로 망명한 후 프라네커대학의 교수가 됐고, 1618-1619년 도르트노회의 고문으로 섬겼다. 또한 개혁파 경건주의를 주도홍은 개혁파 정통신학자였던 요한네스 코케유스(1603-1669)가 언약신학을 주장하면서 지금까지의 개혁파정통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경건주의 색채가 깊은 주장을 펼침으로 개혁파경건주의에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코케유스는 독일 브레멘에서 태어났고, 1636년 네덜란드의 프라네커대학 교수가 됐고, 1650년 이 후에는 레이든에서 가르쳤다.

독일 개혁파교회 내에서 청교도운동에 영향을 받았던 신학자인 빌렘 텔링크(1579-1629)는 1612년 미델부르크의 목사가 됐고, 이 도시는 후에 개혁파경건주의의 중심지가 됐다. 말년에 그가 쓴 ‘경건의 실천’에서는 신비주의로 기운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회신부였다가 1650년 칼빈주의자가 됐던 프랑스출신 장 드 라바디(1610-1674)는 1659년 제네바의 설교자로 있다가 1666년 미델부르크의 목사가 된 후 ‘교회 안에 교회’를 시작하자 분리주의자로 정죄됐다. 계속해서 주도홍은 교회 안에서 ‘중생한 자들의 집회’를 시작했던 테오도를 운데어아익에 이어 “언약의 노래”를 지어 많은 감화를 끼친 요하킴 네안더(1650-1680), 네덜란드 개혁주의 지역에서 태어나 독일 뮐하임에서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평신도 설교가로, 저술가로, 찬송가작가로 개혁파경건주의의 신비주의가로 알려진 게르하르트 테르스테겐(1697-1769)을 개혁파경건주의의 중요인물들로 열거한다.

개혁파경건주의의 중심인물인 테오도르 운데어아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는 1635년 독일 두이스부르크 근교 알테슈탓트에서 태어나 1653년 두이스부르크대학(현 본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헬라어를 전공했으나 1년 후 네덜란드의 위트레히트대학으로 옮겨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는데, 그곳에는 개혁교회신학에 가장 보수적 이었던 히스베르트 푸치우스가 강의하고 있었다. 1657년 2월 네덜란드에서 두이스부르크로 돌아 와 그는 이 곳 대학에서 요한네스 코케유스 언약신학의 영향을 받은 요한네스 클라우베르크와 마르티누스 훈디우스를 통하여 코케유스의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1658년 코케우스가 강의하고 있는 라이덴대학으로 가 한 학기 수학 후 다시 돌아왔다. 1660-68에 그는 루어의 뮐하임에서 목회하면서 예정론에 근거한 설교를 했고, 경건운동을 위해 “작은 교회”운동을 전개했다. 주도홍은 운데어아익이 필립 야콥 슈페너가 1670년 8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했던 것보다 5-10년 앞선 때에 경건운동을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운데어아익은 1668년 6월부터 70년까지 헷센의 카셀의 궁중목회자로 있었고, 그의 마지막 목회지는 23년의 목회를 했던 브레멘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마틴스교회 목사로서 교회의 개혁운동을 이끌면서, “브레멘경건주의의 아버지”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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