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수난절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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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수난절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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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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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한 목사(대한기독교서회 사장)

어느새 겨울이 갔다. 춘풍이 나른한 몸을 휘감는다. 온갖 봄꽃이 들과 골짜기를 물들였다. 봄꽃은 남녘으로부터 북으로 북으로 밀고 올라온다. 머잖아 한반도 삼천리를 온통 수놓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계절을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사순절, 그리스도의 ‘수난(受難)’을 기리는 절기이기 때문이다.

흔히 ‘수난’은 재난을 당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부닥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수난은 단순히 어려움이나 고통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신의 수난’이다. 신의 수난이란 한마디로 ‘모순된 수난’이다. 도무지 고통을 받을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분이 고통을 받고 죽었다니, 그것은 논리적으로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모순이다. 기독교 신앙이 이 위에 서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이 남을 위한 수난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타자를 위한 수난’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타자’ 곧 다른 사람을 위한 존재라고 고백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수난은 다른 사람을 위한 수난, 곧 사랑의 수난이다. 그분의 수난의 중심에는 다른 사람, 타자, 이웃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중심에는 우리 자신이 버티고 있다. 이것이 비극이다.

요즘 교계 언론에서 통일에 관한 행사와 인터뷰 기사를 흔히 보게 된다. 많은 지도자들이 나서서 통일을 외치고, 큰 집회를 연다.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분단 70년이 되는 해다. 매스컴들이 연일, 통일 없는 광복은 미완의 광복이라고 외친다. 대통령도 통일이 대박이라 한다. 신앙인들도 이 민족의 일원인 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성찰 없이 시류(時流)를 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남과 북은 70년 동안 적대감과 증오를 쌓을 만큼 쌓아왔다. 그것은 삼팔선이 그어지던 초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확대됐다. 한국기독교의 다수는 그 적대와 증오의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그 적대와 증오의 확대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게 된 이유가 없지 않다.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입은 상처가 너무나 컸다. 쉬 아물지 않을 상처다. 그래서 한국전쟁 직후, 교계 지도자들이 생각한 통일은 북진통일이었다. 그것은 흡수통일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통일은 적어도 상대가 사라진 통일, ‘우리’가 중심이 된 통일이다. 북의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여 생각한다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문화, 우리 사고방식이 중심이다. 탈북민들이 남한 사회에서 이류시민처럼 살아가는 것이 명백한 증거다.
어떤 형태가 되든지 통일의 과정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정치사회적, 문화적 갈등과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다. 북쪽의 사람들은 천대받거나 괄시받을 것이다. 이 문제로 통일 독일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독일보다 몇 달 앞서 통일한 예멘은 비슷한 문제로 내전 중이다. 통일이 또 다른 화근이 된 것이다.

통일은 화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화해는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고, 적어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화해는 남의 용서를 요구하기 전에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할 때 실현된다. 한국교회는 통일을 말하기 전에 먼저 북쪽에 대한 지난날의 태도부터 참회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을 위한 통일인지, 누구를 위한 통일인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라야 한반도의 통일이 몰고 올 고통을 감내하고, 그야말로 민족의 고통을 짊어진 수난자, 화해자 교회가 되지 않겠나? 통일에 대한 생각이 이 수난의 절기에 화두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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