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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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버님이 자랑스럽습니다
  • 승인 2003.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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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토리코의 국립미술관에는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이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노인과 여인’이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방문객들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 행각을 그린 싸구려 작품이 국립미술관 정면 입구에 걸려있다는 불쾌한 감정을 몰아쉬며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주책 스런 노인과 이성을 잃은 젊은 여성의 부도덕을 통렬히 꾸짖는다.

푸른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이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투사였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다. 딸은 해산한지 며칠이 지나서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았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다.

노인과 여인은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과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이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 으로 자랑하고 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3류 포르노’라고 비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도 한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한다.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한다.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진다. 교만과 아집, 그리고 이기적인 편견을 버리면 세상이 보인다.

나의 아버지는 재벌도, 국회의원, 의사, 변호사, 박사, 교수, 선생도 목사도 아닌 학교 문턱도 못 밟아 보신 섬머슴이셨다. 가난한 섬 마을에서 태어나 칡뿌리, 소나무껍질로 청소년기를 보내시며 남의 집 머슴으로 사셨다. 보리 고개를 넘으시면서 어머니를 만나시고 염전 판에서 소금물에 쩔으시고, 서른, 마흔의 중턱까지는 막노동으로 갯벌을 이고 선 섬마을 선창가에서 휘어진 어깨로 수천 수백, 짐 가마니를 메어 나르시는 짐꾼이셨다.

쉰을 갓 넘으신 나의 아버님은 당신의 장남이 신의 은총을 입어 당신이 걸으신 선머슴, 길 잃은 사람들의 뱃놈이 되어 노젖는 나룻꾼이 되자 결국 술과 담배로 찌든 떼에 못 이겨 구강암이라는 턱이 손바닥 크기만 하게 까발쳐진 흉측스런 암덩어리, 고통의 훈장까지 달고 끝내는 머슴이 된 아들의 품에 앉겨 어깨 숨으로 찬송을 부르시면서 구원의 뱃삯도 내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셨다.

그때는 철이 없어 아버지만 생각하면 부끄럽고 저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하면서 외면하고 뒤 돌아서서 하루빨리 아버지가 죽기를 기도했다. 용서 못할 똑똑한 전도사, 목이 뻣뻣했던 초년목사 그 시절이 한없이 부끄럽고 원망스럽다. 어느 듯 큰 바다에 나와서 일까? 굵직굵직한 파도에 겁이 난다. 지루한 종선 목회의 노젖기가 무척이나 힘이 든다. 이제야 겨우 철이 들기 시작한 것 같다.

나의 아버님은 노 한 자루로 폭풍과 태풍도 물리치셨다. 비바람,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셨다.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 보다 나의 아버님이 자랑스럽다. 갯물에 찌들어 파도에 밀리는 바닷가 쓰레기처럼 의미 없는 생을 사셨지만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머슴의 삶에는 충실하셨다.

나의 아버지, 남들처럼 세상의 많은 유산을 물려주시지 못하셨지만 종놈의 삶, 노젖는 방법만큼은 무식하리 만큼 가르쳐 주셨다.

그때 그 날 밤, 당신과 함께 노저어 바다를 건넜기에 오늘도 나는 머슴생활, 종놈의 길에서 종선지기의 불평을 가까이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단 한번만이라도 아버님과 함께 노저을 수 있었으면 하는 후회스러운 기도를 드려본다.

캐나다 코퀴틀람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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