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광야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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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광야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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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3.1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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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 목사 (동네작은교회)

사순절기간이다. 40일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사역,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보내는 기간이다. 40일의 기간이 주는 의미는 성경에서 분명하다. 바로 절제와 인내 그리고 기다림이다.

40일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광야에서의 금식기간을 생각나게 한다. 구약의 모세가 시내산에서 약속의 계명을 받기 위해 기다렸던 것 처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에 앞서 40일간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예수는 사실 왕손이다. 마태복음은 그 첫 선포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알리고 있다. 즉 예수는 다윗의 가문 즉 왕의 가문출신이다. 그런 예수를 마가복음에는 앞뒤 다 자르고 세레요한의 요단강에서 서 있는 모습에서
시작하고 있다. 왕손이 광야신앙, 요단강신앙의 무대에서 자신을 보이신 다는 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

그때도 그렇지만 현재까지도 인간은 끊임없이 중앙무대를 선망하며 중앙에서 맘껏 자신을 드러내는 삶을 꿈꾼다. 그것이 진정한 삶의 이상이며 인간이 있어야 할 최고의 자리라고 믿고 있다. 메시야 정도면 당대에 로마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예루살렘 정도에서는 무언가를 도모 하셔야 격이 맞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초라하고 권력과 상관없고 온갖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요단강에서 자신의 공개화 시키고 계시다. 전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제사장 라인도 있고, 규율과 모범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바리새파도 있는데 고작 6개월 먼저 태어난 세레요한 라인에 줄을 대신 그의 등장은 왕손과 참 어긋나도 한참이다.

기독교의 본질이 이것이다. 힘과 권력 소위 말하는 영향력의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회개와 눈물의 요단강이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유력한 자들도 권력의 핵심도 자본의 집중도 없는 그저 시대의 아픔과 자신의 한계에 절절히 회개를 통한 변화만을 꿈꾸며 광야의 소리만이 울려 퍼지는 그 소박하고 단순한 그 자리가 바로 기독교의 출발이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자화자찬하고 학위와 커리어를 명함에 줄줄이 집어 넣은 명함을 갖고 있어야 얼굴들고 다니는 오늘의 우리 사역자들의 너무나 요란한 그러나 무기력하기에 이를 데 없는 그런 자리는 예루살렘을 아직도 꿈꾸며 자신이 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사탄의 콜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광야 40일은 요단강의 세례 이후 예수께서 맞이한 자리이다. 그 자리에서 그분은 다시 주변인의 삶을 확인해 준다. 그리고 사순절 기간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광야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요즘의 우리들의 삶이 광야이다. 이 지독히도 가슴아픈 현실을 외면말고 종교의 환상으로 뒤덮어 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내려놓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를 바라보자. 주변인으로 시작한 그의 사역은 진정으로 요단강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으로 만들어 버리셨다. 세상의 중심은 자본이나 권력이나 유명세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바로 그 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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