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갈등 해소 첫 단추는 하나 된 한국교회”
상태바
“남남갈등 해소 첫 단추는 하나 된 한국교회”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5.02.24 2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분단 70년, 화해가 먼저다’ ④복음적 통일 이루려면 교회 분열 멈춰야
▲ 1959년 9월 열린 제44회 장로교총회는 합동과 통합이 갈라지는 분열총회가 됐다.

2015년, 분단 70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한국교회 내부에는 해방 이후부터 계승되어 온 여러 형태의 갈등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이같은 갈등은 교회의 분열로 이어져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발표 기준 국내 개신교단 수만 232개에 이르렀다. 본보는 연초부터 ‘분단 70년, 화해가 먼저다’라는 주제로 연중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한국교회의 분열사를 짚어봄으로써 통일시대 한국교회가 나가야 할 길을 모색해 본다.

1945년. 한반도는 연합군의 승리로 인해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 아래 남북으로 점령군이 들어왔고, 미-소 군정은 새로운 통치력으로 등장해 한국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혼란은 건국의 과정에서 여러 세력들 간의 대결로 치달아 정작 이뤄내야 할 해방의 새 역사를 창출해 내는 데는 실패하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치․사회적 이념 갈등은 교회의 재건과정에서도 극명한 대립 상황을 야기했다. 해방은 기독교인들에게 잃었던 나라와 신앙의 자유를 되찾는 감격을 안겨주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공중분해 돼버린 교회의 회복이라는 과제를 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는 몇 차례의 분열을 겪게 된다.

#장로교의 분열의 시초 ‘고려파’의 분리

백석대 조병하 교수(역사신학)는 “한국교회의 분열사는 곧 장로교의 분열사”라고 설명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한국 장로교의 분열에는 크게 3가지의 모멘텀이 있었다. 첫 번째 분열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부산경남지역에서 일어난다. 당시 경남노회에는 한상동․주남선 목사로 대표되는 소수의 ‘출옥성도들’과 적극적으로 친일에 가담했던 김길창 등 일부 목사들, 그리고 일제의 강요에 못 이겨 소극적으로 순응했던 대다수 사람들의 세 부류가 있었다. 당시 노회 재건에 절대적인 역할을 맡은 건 소수의 출옥성도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청산’을 외치며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조선신학교를 대신하는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46년 부산에서 고려신학교가 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열린 제48회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친일행각으로 널리 알려진 김길창이 노회장으로 당선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김길창은 고려신학교를 비판하며 인준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을 금지시킨다. 이 과정에서 한상동과 지지 세력들이 임시노회를 열고 김길창 이하 임원 전체를 사퇴시키고 출옥 성도 중심의 교회 재건을 결의하게 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경남노회는 두 개로 분열된다.

이후 한상동을 주측으로 한 이들은 1951년 부산에서 열린 제36회 계속총회가 자신들이 파송한 대의원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자 이듬해 9월 독자적인 총회를 조직했다. 오늘날 ‘고신파’라고 부르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이 탄생한 것이다. 조병하 교수는 고신측의 분열과정에 대해 “장로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깔끔하게 청산하지 못한 결과가 교단 분열로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자유주의 논쟁으로 인한 기장의 분열

고신의 분리 이후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때 즈음 장로회는 또 한 번의 분열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분열이다. 그 중심에는 한신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신학교는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폐교한 뒤, 김재준․송창근․채필근 목사를 중심으로 1940년 총회의 인준을 받고 출발했다. 조선신학교는 해방 직후 유일한 장로교신학교였지만 보수적 신학의 분위기에서 자라온 대부분의 장로교 인사들 뿐 아니라 미국과 호주의 선교사들과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다. 결국 김재준 목사의 신학적 성향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던 보수적인 학생들이 1947년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진정서에는 근대주의 신학과 성경의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을 배척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에 1947년 제33회 총회에서는 8인의 조사위원을 세워 김재준과 그의 신학적 동반자였던 송창근을 조사하기 이르렀다. 김재준은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내용의 진술서를 제출했고 조사위원들은 이 논리에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무렵 서울에서는 자유주의 산학의 확산을 경계하는 목사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교 건립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드의 지원 아래 고려신학교와 결별한 박형룡을 교장으로 삼고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1948년 6월 장로회신학교가 정식 개교하자 이듬해 총회에서는 이를 정식 신학교로 인준했다. 이로써 총회 안에는 두 개의 직영 신학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총회에서는 해가 거듭될수록 진보적 신학에 대한 압박이 증가하면서 조선신학교측이 새 교단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1954년 교단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바꿀 당시 소속 교회는 600여개였다.

#역사상 가장 큰 분열 초래한 WCC 논쟁

고신파와 기장이 분립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장로 교회는 기존의 총회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두 교단이 떨어져 나간 이후에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대 분열을 초래했다. 그 중심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창립된 WCC는 전 세계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추구했다. 그런 WCC가 한국에 와서는 분열의 단초가 됐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창립대회에 참석했던 김관식이 귀국 후 한국 장로교의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제안하자 총회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보수진영은 WCC가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기관이라며 반대에 나섰고, 이후 10년이 넘도록 지리한 이념 갈들을 벌였다. 특히 복음주의협의회(NAE)에 가입한 이들은 WCC를 자유주의라고 공격했다. 이런 와중에 대구에 있던 신학교를 서울로 옮기기 위해 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총회신학교 교장이자 WCC 가입 반대파의 중심이던 박형룡이 측근에게 삼천만환이라는 엄청난 돈을 사기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59년 WCC를 지지하는 총대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임원을 선출하고, NAE측은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열어 WCC 영구 탈퇴를 결의했다. 이를 계기로 각 노회와 지교회들도 ‘연동측’과 ‘승동측’으로 양분됐고, 연동측은 광장동에 장로회신학대학을, 승동측은 사당동에 총신대학교를 세웠다. 이후 승동측은 1960년 12월 12일 신학이 같았던 고신측과 일시적으로 연합하기도 했지만 3년만에 다시 분리됐다. 이때부터 승동측은 고신과 합동했다는 뜻에서 ‘합동’이라 불렀고, 연동측은 ‘장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표제어를 내걸어 ‘통합측’이라고 부르게 됐다.

#명분 없는 분열은 죄악... 통일 앞서 교회 하나되야

조병하 교수는 고신과 기장, 통합의 분열에 대해 “여기까지는 그래도 명분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1959년 통합이 분리된 이후의 합동측은 주류 대 비주류의 싸움으로 인한 ‘핵분열’로 명분을 찾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조 교수의 설명대로 합동측은 고신측과 통합 및 재분열 이후에도 내부 분열을 거듭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9년 합동과 합동보수의 분열 및 1980년 합동신학교의 분립이다. 1978년 박형룡의 사망 이후 그를 따르던 정규오․박아론 등 총회 내의 비주류의 세력이 교권 세력에 도전하면서 합동보수라는 독자적 교단을 세웠다. 이듬해에는 총신대 학생들이 학교측의 독단적 운영에 불만을 제기하면서 학내 사태가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박윤선 교수를 비롯한 4명의 교수와 수백 명의 학생이 학교를 떠났다. 이들이 세운 합동신학교는 1년 뒤 독자적 교단으로 발전했다. 이밖에도 한국 장로교는 계속된 분열을 겪으며 100개가 넘는 교단으로 쪼개지게 됐다.

감리교의 경우 일제의 잔재 청산, 그리고 감독선거 과정의 교권다툼으로 교단이 3차례 분열되는 역사를 겪었으나 1978년 결국 하나로 통합을 이뤘다. 성결교는 1961년 WCC 가입 문제로 기독교대한성결회와 예수교대한성결회로 쪼개진 뒤 지금까지 양 교단 체재를 이루고 있다. 침례교는 1959년 총회와 선교부의 갈등으로 인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으로 분열을 겪었지만 1968년 통합을 이뤘다.

기독교통일학회 직전회장 주도홍 교수는 한국교회 분열사의 특징으로 “신학적 차이에 따른 분열이 별로 없다”는 것을 꼽았다. 그는 “대부분이 교권싸움과 지역별 권력다툼으로 볼 수 있다”며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 되고 화평케 하지 못한 우리의 영적 죄악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또 “가능한 빨리 회개하는 마음으로 연합운동 펼쳐야 한다”며 “통일에 앞서 한국교회가 화해와 연합을 통해 먼저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