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조적 소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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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조적 소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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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2.04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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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목사(의왕중앙교회)

바닷물의 염분농도는 평균 2.8%로 알려져 있다. 3%도 채 안 되는 적은 양의 소금기가 온 바다를 정화하면서 무수한 해양생물들을 넉넉히 살아 숨 쉬게 한다.
사람들의 모든 인생살이도 자연생태계의 구조와 그리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역사상 어떤 사회 어떤 시대에도 바닷물의 염분과 같은 자정능력을 갖춘 살아 있는 엘리트 그룹이 있었겠지만 이 엘리트들은 결코 지배계층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더욱이나 권력계층은 아니었다.


진실의 목소리로 그 시대, 그 사회를 정화하고자 했던 엘리트 그룹은 오히려 소외된 소수의 무리들이었음을 역사는 교훈한다. 그들은 다수의 오해와 핍박 속에서 목숨을 걸고 진실을 지키려 애썼던 ‘광야의 소수’였다.


엘리자베스 1세의 국교통일령(國敎 統一令)이 내려지자 북미대륙으로 건너가 부모형제의 시체 곁에서 땅을 갈고, 씨를 뿌렸던 청교도들, 1572년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때, 조국 프랑스를 탈출한 뒤 스위스 영국 등지에서 산업혁명의 기틀을 다진 위그노(Huguenot)…. 등이 광야의 소수자들이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이들을 가리켜 ‘창조적 소수’(The Creative Minority)라고 불렀다. 인류역사가 이들 창조적 소수 즉 그 소외된 진실의 무리들로 인해서 그나마 아직까지 희망과 가치를 이어오고 있다는 토인비의 믿음에 깊이 동의한다.
세속의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 속의 역사,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엘리야, 예레미야와 아모스 같은 예언자들이 그러했고, 세례요한과 사도 바울이 그러했다. 아니, 예수님 자신이 그 진실한 소수를 대표하는 십자가의 처형 수인(囚人)이였지 않은가.


16세기 초 독일의 루터가 막강한 로마 가톨릭 교황에 대항하여 진실한 소수의 길을 걸었고, 19세기 네덜란드 국교회(國敎會)의 타락에 맞섰던 그룬트비목사와 철학자 키엘케골이 그 소수의 고난을 이어받았으며, 20세기의 어두운 일제의 식민지에서 일제의 총칼 앞에 당당히 목을 드리우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이 땅의 순교자들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창조적 소수였다.


소수의 진실한 엘리트들이야말로 바닷물에 녹아있는 2.8%의 염분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들이 걷는 길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그리고 예수님은 또다시 선언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오늘 이 땅의 신자들이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교회숫자는 5만을 넘었고, 목사만도 족히 10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2.8%가 아니라 전 인구의 25%에 육박하도록 하나님을 믿는 이 나라, 이 사회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물신(物神)과 쾌락의 장터가 되어버린 이 땅이지만 교회들과 신자들이 지금처럼 불신의 지탄의 대상이 된 때가 일찍이 없었다.


25%가 아니라 단 2.8%의 신자들만이라도 진실한 신자의 길을 걷는다면, 아니 무려 10만 명에 이른다는 이 땅의 목회자들만이라도 바닷물의 소금처럼 자정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준다면, ‘주의 종’이라는 별칭에 걸맞도록, 섬김 받기를 사양하고, 진정 섬기며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다면, 위선과 거짓의 넓은 길을 버리고 진실과 정직의 좁은 문을 애써 지킨다면, 오늘 이 땅의 교회가 어찌 이처럼 부끄럽겠는가?


예수님과 사도바울은 대제사장이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루터와 칼빈은 가톨릭 교황이나 사제들이 바른 길을 걷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의 소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대제사장이나 중세의 교황이나 사제들은 모두가 위선과 거짓 속에서 멸망의 넓은 길을 걸었던 다수의 대표자들이지만, 예수님과 바울이나 루터는 좁고 험한 생명의 길을 걸었던 2.8%의 진실한 창조적 소수였다.


일부의 주류목회자들이 넓은 길 걷기를 즐긴다고 해서 모두가 눈먼 망아지처럼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우리들에게는 내 몫의 열려진 좁은 길이 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제사장과 함께 멸망의 넓은 길을 걷는 다수의 무리 중의 하나인가, 아니면 생명의 좁고 험한 길을 걷는, 바닷물에 녹아있는 2.8%의 소금처럼 진실하고 정직한 창조적 소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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