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자치 한필’의 사모곡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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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자치 한필’의 사모곡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 이성원 기자
  • 승인 2014.12.01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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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를 회고하는 이상운 장로

가을이 깊어가는 요즘, 거리는 온통 낙엽이다. 떨어지는 낙엽, 쌓이는 낙엽, 발길에 차이는 낙엽. 낙엽은 밟혀 부서지며 이렇게 행인에게 속삭인다. ‘너도 멀지 않았어.’ 아무리 무심한 행인이라도 지나간 인생, 남은 인생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명예회장인 이상운 장로(새누리교회 원로)는 최근 ‘무명자치 한필’이란 책을 냈다. 노년에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격랑의 현대사와 함께한 그 시절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고백록이다.

마을 복음화 이룬 어머니

밤실 마을 어린 시절, 주일이면 집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곤 했다. 교회 가는 걸 반대했던 할아버지, 교회가 전부였던 어머니 그리고 그 중간에서 모른 척 하시는 아버지 사이에서 5남매는 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태는 정리됐다. 교회 가려는 손주들에게 불호령을 내렸던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하시며 눈감아 주는 날이 많아졌다.

“할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안쓰러워서 그랬을 겁니다. 아버지는 몸이 약해서 늘 누워계셨고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머니는 집안일에 농사까지 하시고, 게다가 할아버지 봉양에, 아버지 병수발에 아이들 다섯을 돌보는 일까지 도맡으셨으니까요. 모든 짐을 홀로 지고 가는 며느리를 보면서 교회 갈 때만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으셨을 겁니다.”

밥 한술을 넣어도 기침 때문에 밥을 삼킬 수 없었던 아버지, 기침 소리로밖에 기억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병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때 어머니 나이 불과 서른여섯이었다. 기도가 버팀목이 되지 않았더라면 벌써 어머니는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었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었고, 친척들은 손 벌릴까봐 모진 말로 밀어냈지만 교인들은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위로와 기도로 후원해줬다.

▲ 어머니 이병옥 권사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는 야학 선생님도 하셨어요. 당시 일본은 우리말과 글을 말살시키려고 했잖아요. 어머니는 낮에는 밭일과 길쌈을 하시고 피곤하실 텐데 밤이면 동네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셨어요. 조는 분들이 보이면 잠을 깨운다고 찬송을 가르치시고 성경을 읽게 하시면서 한글을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50가구 가운데 80%인 40가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또 다른 공포의 세상이 찾아왔다. 교회 권사였고 자유당 부인회 회장이었던 어머니는 ‘반동분자’로 총살형 1호였다. 마침내 어느 토요일 오후,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들은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개 끌듯이 끌고 갔다. 어린 이 장로는 저항할 수 없었다. 총구를 들이대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면 살려 준다”는 서슬 시퍼런 협박에도,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이 무섭지 않느냐”는 어머니의 의연한 절규가 언덕 너머로 울려 퍼졌다. 이윽고 공기를 찢는 총소리와 무서운 침묵.

총부리 앞에서도 신앙을 지켜

“어머니가 총살당하신 줄 알았어요. 우리는 모두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죠.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생겼어요. 사흘 뒤 밤에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데 어머니예요. 얼마나 놀랐는지. 알고 보니 그 공산당이 자기도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예수 믿는다며 도망치라고 한 겁니다.”

불사조 같은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청상과부로 5남매를 키워온 어머니는 죽음마저도 뚫고 나오셨다. 어머니의 그 당당한, 그러나 희생적인 모습을 이 장로는 ‘무명자치 한 필’에서 추억한다.

“청주 세광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등록금을 낼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큰형이 군입대를 하게 돼서 농사지을 사람도 없었고요. 그래서 휴학하고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집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 저를 보고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누가 너보고 농사지으라고 했냐, 너는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고요.”

등록금 마감 2일 전,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 앞에 무명자치 한 필을 내놓았다. 절절한 호소가 이어졌다. “계속 1등만 해온 아이가 돈이 없어서 공부를 중단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일단 이 무명자치 한 필 받으시고 시간을 좀 주십시오.” 당황해하며 난색을 표하던 교장 선생님은 간절한 부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명천은 어머니가 누나를 시집보낼 때에 쓰려고 보관했던 소중한 옷감이었다.

“어머니는 낮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잠을 쫓아내며 길쌈을 했던 거죠. 그래서 손수 베틀로 짠 무명자치 한 필이었어요. 그 후로 공부를 하면서 힘들 때면 그 무명 자치 한 필을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곤 했습니다. 무명 자치 한 필에 담긴 어머니의 사랑이 오늘 저를 만든 것이죠.”

 

▲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가을에 인생을 묵상한다. 지나간 일들 속에서 굽이굽이 하나님의 은혜를 반추한다. 어머니를 통해 만난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감사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전경련과 함께 한 세월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그는 4.19혁명 한 가운데에서 고려대 데모를 지휘하며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 후 한 은사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정치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공명정대한 사람은 패배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 이기는 선거판을 겪으며 마음이 정치에서 경제 분야로 돌아섰다.

“군사혁명 다음 해인 1962년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경련)가 설립됐습니다. 그때 제1기 공채 사원을 모집했는데 제가 3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어요. 그후 전경련에 근무하면서 많은 일을 했지요. 정치자금양성화법과 자본시장 육성법 제안, 최초 증권거래소 개장, 26개국과 경제협력위원회 창설, 한국경제연구원 설립, 수출산업공단 및 구미전자공단 등 각 공단 조성, 여의도 전경련 회관 건립, 국제경영원 창설 등 나름 자유경제로 가는 길을 닦았다고 자부합니다.”

이 장로는 전경련에 신앙적인 길도 닦았다. 전경련의 모든 사안을 추진할 때에 기독인들은 늘 기도로 일을 시작했다. 토요채플을 시작했고 1979년엔 경제인 조찬기도회가 발족됐다. 어릴 적에 주일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던 현대 정주영 회장은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면서 목사님들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영접했다.

“전경련에서 퇴임하고 나서 어려운 일도 있었죠. 고합그룹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일할 때에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했고, 아내가 대장암 3기로 투병하고 있을 때에 제가 또 대장암 2기 판정을 받았어요. 지금은 완쾌가 되었지만 그때는 하루하루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죠. 그러나 그때 깨달은 게 있어요. 행복이란 거창한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작은 일들에 감사하면서 누린다는 것을요. 행복해서 감사한 게 아니라 감사하니까 행복해졌습니다.”

살아생전에 불쑥불쑥 돈을 달라고 하셨던 어머니. 나중에서야 작은 교회 강대상을 사주시고 개척교회 목사님의 자녀 등록금을 내주시고 고아원을 돕는 일에 쓰신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입에 들어가는 음식조차 아꼈지만 교회와 목회자를 섬기는 일에는 배포가 크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 덕에 저희 가문이 자랑스러운 믿음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에 ‘이병옥 선교재단’을 설립해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제가 돈이 없어서 무명 자치 한 필로 등록금을 대신해달라고 사정했던 때를 잊지 못하니까요. 지금도 어머니가 그리워서 못 견딜 때가 있어요. 그러면 온양 선산에 묻힌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천국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죠. 그때까지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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