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사람은 무엇을 해야 되는가 (2)
상태바
(48) 사람은 무엇을 해야 되는가 (2)
  • 운영자
  • 승인 2014.07.04 1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훈섭은 5년 전 마다가스카 암바투비(Ambatuvy) 소재 닉켈광산 발전소에 1년 간 KN기업에서 파견 근무를 한 적이 있었다. 김훈섭이 마다가스카의 수도 안타나리보(Antanarivo)를 처음 보는 순간 한국의 1960대 초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했다.

어는 토요일 오후 김훈섭 몽마르 마을 근처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칸타르라는 원주민을 만났다. 그는 김훈섭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부인과 3남매와 살고 있었다. 그의 집은 결혼하면서 칸타르가 만든 초라한 집이었다. 그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듯 김훈섭을 후히 대접했다. 칸타르는 1년 사이에 아들 둘을 잃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마다가스카 아이들의 생존율은 절반이었다. 사망 원인은 말라리아나 이질, 영양실조가 주된 원인이었다.

3개월 후 김훈섭이 칸타르를 다시 만났을 때는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딸 마리아(5세)가 열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칸타르는 무릎을 꿇고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펴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김훈섭은 칸타르의 딸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보면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는 급히 회사로 돌아와 상비약과 얼마의 식량을 준비해 몽마르 마을을 다시 찾았다. 칸타르의 집에는 마을 주민들의 와서 마리아의 병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3일 후 김훈섭이 칸타르의 집을 방문했을 때 칸타르는 두 손을 합장하고 그의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그의 딸을 구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김훈섭은 1년 동안 암바투비에 체류하면서 매주 일요일마다 몽마르 마을을 방문해 그들을 도왔다.

마다가스카는 아프리카 대륙 남동해안 인도양 서남부에 위치한 세계 4번째로 큰 섬나라다. 이곳을 관광 온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보고 “천혜의 섬, 또는 신이 머무는 섬”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윌리엄 왕자가 신혼여행을 올 정도로 섬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한때 사파이어 광산이 발견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이 몰려온 적도 있었다.

마다가스카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인 듯 했다. 원주민들은 이를 두고서 “올 포 원(All for one), 원 포 올(One for all)"이라고 부르곤 하였다.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문화란 명칭은 이들에게 하나의 사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김훈섭이 체류기간을 하루 앞둔 토요일, 몽마르 주민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데리고 그의 근무지를 찾아왔다. 정문 수위는 마을 주민들이 항의시위를 하러온 것으로 착각했다. 마을 어린이들은 수위를 향해서 “파더, 파더(Father-신부)”라고 외쳤다. 그들의 외침은 자기들의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하는듯 했다. 경비원이 그들을 제지하려 하자 그들 앞에 칸타르가 나서서 “써르 킴훈섭!(Sir, Kim-hoonseob)”이라고 말했다. 그곳에 온 30여 명의 어린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의 손에는 과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김훈섭이 현장 소장에게 자신을 방문한 몽마르의 어린이들이라고 해명했다.

암바투비에 발전소가 설립된지 1년 되는 날이었다. 발전소에서 준비한 음식과 몽마르 주민이 선물한 풍성한 과일로 합동 오찬회가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김훈섭의 송별회도 치러졌다. 김훈섭은 어린이들의 눈망울 속에서 마다가스카의 미래가 그들 속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훈섭이 해외 파견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후 6개월이 흘러갔다. 해외 파견시 겪은 긴장감은 모두 없어졌고 안일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6.25 전쟁 때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사는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숙면을 취할 수 없었다. 편안히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무 걱정이 없었다. 두 자녀는 결혼해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가 노년에 필요한 재정적인 문제도 다 마련 된 상태였다. 그런 그였지만 날이 갈수록 몸은 초췌해졌고 밤마다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김훈섭은 수요일 예배 때 칠레 선교사 허구연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선교사의 설교가 자신을 향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마다가스카를 떠날 때 어린이들이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몽마르로 돌아와요!(Come back to Montare)"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마다가스카에 파견된 일, 몽마르 마을의 칸타르를 만난 일, 그의 딸 마리아가 살아난 일들이 어떤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심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심의 소리가 반항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는 명령의 소리도 들려왔다.

그는 7살 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을 평생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부모는 경북 상주 화북이란 마을에서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었다. 6.25 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후퇴하면서 화북리 마을을 경유하여 북으로 퇴각하였다. 그들이 화북리 마을에 진주하여 주민들의 모든 식량을 모조리 탈취해갔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나물을 채취하여 솥에 삶은 후 간장을 넣고 음식을 대신하여 연명을 하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황달병이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김훈섭은 나물을 캐러 집을 나간 그의 어머니를 찾으러 가던 중 굶주림으로 탈진하여 길에 쓰러졌다. 그가 길에서 혼절한 상태에서 있을 때 찝차를 운전하고 그곳을 지나던 미 8군 소속 전령 로버트(Rovert) 하사가 그를 발견하고 치를 세웠다.

“컴 투열 쎌프!(Come to yourself)”

로버트 하사는 혼절한 김훈섭을 향해 “정신 차려! 정신 차려!”라며 흔들었다. 그는 수통의 뚜껑을 열고 김훈섭의 입을 벌려 물을 먹였다. 물을 먹은 김훈섭은 기침을 하며 정신이 되돌아 왔다.

로버트 하사는 가방에서 식빵을 꺼내 김훈섭에게 건네주었다. 로버트 하사는 무엇인가를 쓴(Jesus is our Savior, God's glace is our life!) 쪽지 한 장을 김훈섭의 손에 쥐어준 다음 그의 곁을 떠났다. 김훈섭은 그가 준 쪽지를 그의 책 속에 보관하였다. 그가 쪽지의 내용을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김훈섭이 길에 쓰러졌을 때 그곳을 로버트 하사가 지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살아오면서 풀지 못할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지혜로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태어나고 살며 죽는 것이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김훈섭은 자신의 계획을 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요.”
“남들은 명예퇴직을 하는 나이에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그의 부인은 그가 마다가스카 선교사로 새로운 일을 하려고 결심한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