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무문(大道無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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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무문(大道無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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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1.07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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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 재 목사 / 예수로교회

큰 길에는 문이 없다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큰 도리(道理)나 정도(正道)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누구나 그 길을 걸으면 숨기거나 잔재주를 부릴 필요(必要)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에게는 색욕 권욕 금욕 같은 욕심에 드나드는 문이 있고, 삼치 오악 칠혹에 빠져들고 빠져나오는 문이 있다. 그 욕심의 문들을 젖히고 들면 문이 없는 무문지경에 이른다. 소위 ‘무문관’이요, 세상과 사람을 등지고 이 경지에 이르는 수도를 ‘무문관 수도’라 한다.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항주태수가 되어 진망산을 넘어가는데, 고승 도림선사가 나뭇가지 위에서 무문관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까치처럼 나무 위에서 좌선한다 해서 ‘작소선사’로도 불린 이 고승에게 백낙천이 “위태로운데 내려와 사시지요.”라고 말하자 이에 도림선사는 “자네 마음속에 장작불이 타오르는 게 보이는데 위태로운 건 자네일세.”라고 했다. 백낙천이 시인답게 대답했다. “시를 굽기 위해 태우고 있는 불이니 위태로울 게 없소.” 누가 진짜 무문관 수행의 고수일까? 세상을 등진 도림선사일까? 세상의 번뇌를 가슴에 태우면서 시를 구워내는 백낙천일까? 그들은 정말 문이 없는 무문 지경에 이르렀을까?

무문관 수도의 원류는 출가하여 성도하기까지의 석가모니의 고행일 것이다. 그는 하루에 대추 한 개만 먹고 수도하다가 다음에는 쌀 한 톨, 다시 그 다음 단계는 깨 한 알을 먹으면서 식사를 줄여 단식 6년의 고행 끝에, 해골에 피부만 씌워놓은 듯한 몰골로 하산해 보리수 아래서 득도하여 성불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무문관 수행을 통해 그가 깨우친 대도(大道)는 무엇일까? 설혹 그 분이 깨우쳤다 하더라도 그의 성도(成道)와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느 날 이교도들이 석가모니에게 와서 ‘대도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앉은 자세를 바로하고 “이것이 바로 대도다."라고 했다. 여기서 좌선수도가 유래된 것이다.

중국 숭산 소림사에 가면 달마대사가 면벽 9년간 좌선 수도했다는 초조암이 있다. 신라의 당나라 유학승들이 이 암자에 가서 좌선하는 것을 최고의 수행으로 여겼던 곳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어떤 고승이 눕지 않고 앉아서 잠자며 3년 수도 끝에 앉아서 입적하여 좌관에 입관되어 다비식을 한 적이 있다. 그 분은 과연 무문지경에 이르렀을까? 모두가 헛되고 헛된 무지의 소산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다(잠 1:7). 석가의 실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무문관 수도에 들어간 것이다. 예수만이 길이다. 예수만이 대도무문의 진리다.

2014년이 밝아 왔다. 한국 교회가 예수의 피로 포장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지구촌의 대도무문의 길로 열어가자. 출애굽 하던 날 문설주에 뿌린 하나님의 언약의 피가 구원이 되었듯이 십자가에서 언약대로 흘리신 예수의 피만이 구원의 길인 것이다.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은혜의 길이다. 한국 교회가 혹시라도 이 은혜의 대도무문의 길을 벗어나서 무문관식 수도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과응보의 사상에 뿌리 둔 기도나 헌신, 천국과 지옥의 종말론적 구원이 없는 현세중심 기복신앙, 윤리와 도덕의 교훈적 신앙, 서구신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대주의적 신앙 등은 한국 교회의 길을 막는 문들이다. 헐어내야 한다. 오직 성령님만이 예수의 피로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대도무문의 구원의 길을 우리로 알게 하시고, 우리로 경험하게 하시고, 우리로 살게 하실 수 있다.

성령님, 이 지구촌의 수많은 도림선사들도, 백낙천씨들도 모두 대도무문의 십자가의 길로 함께 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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