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특집] 120년 전 성탄, 과연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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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특집] 120년 전 성탄, 과연 그때는?
  • 공종은 기자
  • 승인 2013.12.19 11: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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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씨 탄일의 깃부고 재미잇는 일이 만히 잇섯다”

‘질거운 크리스마스 - 서양에서는 설보다 더 크게 세는 명절’
‘회사가튼데도 일체 휴업 … 가족과 친구들 프레젠트 교환’

 

‘깃부고 재미잇는 일이 만히 잇서스나 특별이 깃분 일은 남녀 교우들이 깃분 마암으로 삼십여 원을 연보하야 백미 두 섬을 사서 어려운 사람들을 줄새….’(1903. 2. 신학월보에 실린 정동제일교회 성탄절 관련 기사)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지도 벌써 120년이 훌쩍 넘었다. 상투 틀고 쪽진 머리에 기와로 지붕을 얹은 ㄱ자 모양의 교회에서 남녀를 구분해 앉아 예배를 드렸던 그 때는 이제 역사의 기록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120여 년 뒤, 상투 틀고 쪽진 머리의 자손들은 점점 서구화되는 체형과 외모로 서양식 교회당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생활 방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게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성탄절’은 어떨까? 아니 그보다 당시에는 성탄절이 있기나 했을까.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 지켜졌을까. 120여 년 전 그 때로 되돌아 가보자.

# 초기 - 선교사, 그들만의 잔치

120여 년 전에도 성탄절이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교사들만의 잔치였다. 큰 코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낯설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성탄 문화는 고사하고 기독교 또한 한국 사회에 쉽게 녹아들 수 없었고 또 그러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은 광혜원을 설립했던 미국의 의사였던 알렌 선교사의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알렌은 그가 도착한 해인 1884년 12월 26일자 일기에서 당시의 성탄절을 묘사하는데, ‘어제는 성탄절이었다. 파니(Fannie)는 나에게 성탄 선물로 멋진 수놓은 공단 모자와 비단 케이스에 넣은 공단 넥타이 두 개를 주었다. 모두 그녀 손수 만들어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일본 요코하마에 멋진 실크 실내복 한 벌을 15달러에 샀지만 많은 외국 우편물들과 함께 선물할 것들을 이번 정변(갑신정변)이 발생했을 때 잃어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민영익을 잘 치료해 준 대가로 이번 주에 조선 국왕으로부터 멋진 선물을 받았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민영익을 잘 치료해 준 데 대한 보답일 뿐 고종 황제가 성탄절을 알고 선물을 하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상황은 그의 부인이 쓴 전기에서 발견되는데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의 저녁 식사를 대접한 것은 1886년 크리스마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후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는 반드시 자기 집에서 하고 항상 모든 사람에게 해마다 참석해 달라고 했다’고 기록돼 있다.

알렌 선교사나 언더우드 선교사 모두 고종 황제를 비롯해 당시 고위층과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선교 초기부터 성탄 문화가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제일교회의 성탄 축하식 기사를 다룬 1923년 동아일보 기사.

# 1890년대 - 성탄 문화 확산 시작

그러나 한편으로 성탄절은 조선이라는 나라밖에 모르는 순수한 우리 선조들에게 외국의 신문물을 소개하고 신기한 물건과 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이를 적극 활용한 듯이 보인다.

1896년 당시 평양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블(M. W. Noble) 부인은 ‘성탄 전야(前夜)에 부인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는데 부인 30여 명이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는 기도하고 노래하고 성탄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과자와 사탕, 밤으로 그들을 대접했다. 성탄절 아침 우리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두 방이 사람들로 가득 차 바닥에 앉기도 하고 뒤에서는 서기도 하여 할 수 있는 한 앞으로 오려고 했다. 우리 작은 예배당에 약 200명 가량이 왔다. 아더(Rev. W. Arthur Noble) 씨가 성탄절 설교를 한 후, 김창식 씨 부인이 이야기하고 나서 재빨리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는 상당히 질서를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선교 초기 이후 10여 년 정도가 흐른 뒤 성탄 문화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성탄절에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든 것을 알 수 있다.

# 근대화 일제 강점기 - 벌써 퇴폐 변질 조짐

근대화 시기이면서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는 이미 성탄 문화가 온 나라에 확산된 상태였고 이때부터 벌써 상업화되면서 퇴폐화와 변질의 조짐도 보였다. 1936년 12월 25일자 조선일보에는 서양의 크리스마스 풍습을 소개하는 사진들이 실렸다. ‘질거운 크리스마스 - 서양에서는 설보다 더 크게 세는 명절 - 예수가 나신 날’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서양에서는 어떻게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회사가튼데도 일체 휴업을 하고, 가정에서는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 프레젠트가 교환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상업화로 변질되는 데 대한 우려의 기사는 이보다 3년 앞서 등장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의 명물임에는 틀림업스나 점점 기독은 제처노코 샌타크로스만이 광고에까지 등장하고 잇스니, 이러다가는 크리스마스는 샌타크로스 영감만을 위하는 연중행사가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의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싣고 우려했다(1933년 12월 14일자).

우리나라에서 성탄절이 공휴일로 지정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1949년, 불과 64년 전의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로,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던 때였지만, 성탄절만큼은 예외로 했다. ‘크리스마스로 오늘 관공서 휴무’(조선일보 1947년 12월 25일자), ‘크리스마스 전야에 야통 금지 해제’(1954년 12월 20일자) 등의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탄절이 휴일로 정해지고 중요하게 지켜진 것은 결국 해방 이후. 성찬절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지켜오던 미군의 정책이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승만 정권도 여기에 힘을 실었다.
 

1934년에 발행된 성탄절과 새해를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씰.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1950~70년대까지만 해도 ‘성탄절 카드’는 누구나 매년 보내는 연간 행사 중 하나였다. 당시 신문들은 ‘요사이 관청이나 무슨 기관의 장(長)들 간에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것이 대유행’(1954년. 12월 25일자)이라는 내용의 글이 실리기도 했다. 거기다 군인들에게는 어김없이 성탄선물이 보내지기도 했다. 이런 성탄 선물 보내기는 캠페인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장려되기도 했다.

성탄절 하면 떠오르는 ‘구세군 자선냄비’는 1891년 성탄절을 앞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시작됐지만, 한국에서는 37년 뒤인 1928년 12월 15일에 시작됐다. 서울에서 처음 자선냄비를 걸고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당시 848환이 모아져 거리의 걸인들을 모아 죽을 끓여 먹인 것으로 전해진다.

초기 성탄절과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지만, 최초의 한글 성서 번역자로,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의 저자이면서 조선 말기 개신교도였던 이수정(李樹廷)에 대한 기록이 눈에 띈다.

이수정은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인물.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갔다가 한문으로 쓰인 산상수훈을 읽고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산상수훈의 내용에 감명받은 이수정은 일본인 쓰다의 도움으로 한문 성경을 읽다가 기독교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게 되는데, 같은 해 ‘성탄절’에 교회 예배에 처음 참석한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런 성탄의 역사와 함께 한국 교회의 역사는 이어져왔다. 이수정 또한 성탄절에 처음 교회 예배에 참석한 후 세례를 받고 예수의 사람이 됐다. 그리고 예수 탄생의 의미를 뼈에 새기고 복음의 일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120여 년 전 성탄은 말 그대로 ‘새로 태어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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