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국군의 달, 군종 목사의 시작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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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국군의 달, 군종 목사의 시작 알아볼까…
  • 김동근 기자
  • 승인 2013.10.01 2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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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17일까지 전쟁기념관서 ‘전투 군종활동 사료전’ 개최
▲ 국방부는 지난달 26일부터 오는 17일까지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포화 속에서 희망을 기도하다’라는 주제로 6ㆍ25 정전 60주년 기념 ‘전투 군종활동 사료전’을 개최한다.

“생사가 무수히 교차하는 전장에서 총과 탄약 대신 경전을 가지고 다닌 군인이 있었다. 그들의 적은 사람이 아닌 전쟁의 혼돈과 인간의 공포요, 그들의 무기는 총이 아닌 굳건한 신앙과 끝없는 사랑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피로 얼룩진 전쟁 속,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과 싸우는 병사들에게 다가간 이들이 있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그렇게 목숨을 담보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국방부는 지난달 26일부터 오는 17일까지 전쟁기념관 특별전시실에서 ‘포화 속에서 희망을 기도하다’라는 주제로 6ㆍ25 정전 60주년 기념 ‘전투 군종활동 사료전’을 개최한다.

10월 1일 국군의 날을 즈음해 군종활동에 대해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한국기독교군선교연합회(이사장:곽선희 목사)가 함께 후원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대부분의 사료들이 개신교의 것이라는 사실. 역사는 물론 사건들 가운데서도 개신교의 활약은 돋보였다.

사료전에는 ‘군종’이라는 병과가 군대에 생겨나게 된 사건을 비롯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군종 관련 물품들, 그리고 지금 현재 사용되고 있는 군종 물품들에 대한 전시도 빼놓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국립기록관리처(NARA)가 한국전쟁 당시 군종활동 영상을 최초로 공개해 눈길을 끈다.

한 카투사의 편지
정부수립과 함께 조국방위를 위해 15개 병과로 구성된 조선경비대가 창설됐지만, 그 안에 군종 병과는 없었다. 1948년 손원일 제독은 당시 이화여고의 교목이던 정달빈 목사를 초청해 사역하게 함으로, 군목업무는 해군에서 최초로 시작됐다.

1949년 2월 5일, 정달빈 목사는 용산 군인관사 33호에 한국 최초 군인교회인 ‘용산교회’를 설립하고 해군, 육군 장교와 가족 등 15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렸다. 용산군인교회는 해군장병은 물론 타 군에도 개방돼 3군 군종업무의 토대가 됐다.

이렇듯 당시 군 고위 간부들 중에는 군종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건의한 이들이 있었지만, 수렴되지 않은 채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장 속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한 병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올렸다.

“이승만 대통령 각하! 성직자가 군에 들어와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가슴을 신앙의 철판으로무장시키고 기도로 죽음의 두려움을 없게 하여 주옵소서.”

이 진정서로 군종제도의 창설 문제가 적극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 소속 감리교 선교사 쇼우 목사와 천주교 캐롤 신부가 한국 정부와 기독교 단체를 예방하며 군종제도의 필요성과 효과를 재차 주장해 군종제도 창설에 큰 역할을 했다.

▲ 사료전이 열리고 있는 현장의 전경.

‘대령’ 목사
정식으로 계급이 부여된 군종장교들이 군종업무를 시작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군종감실 설치령에 따라 당시 국방부 군종실장으로 있었던 김형도 목사가 초대 군종감이 됐다. 또한 1954년 12월 13일 130명의 군목들이 중위에서 대령까지 임관할 수 있게 됐다. 군종장교들이 본격적으로 군종업무에 나설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당시 군목들은 전 장병들의 인격지도 교관으로 임명되어 정신전력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게 됐다. 1955년 6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군종업무 운영을 위한 정식 국가예산을 지원받았고, 1957년에는 각 부대에 개인 상담소를 설치해 관심병사에 대한 선도에도 나섰다.

그러던 중 1965년 베트남 파병을 계기로 불교의 군종법사가 임관하면서 본래 군목 전투모에 부착했던 십자가 마크가 계급장으로 바뀌고, 군목으로 통칭되던 성직자들을 ‘군종장교’로 총칭했다.

▲ 6.25전쟁 당시 군종목사들이 사용하던 성경책

해외의 군종제도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된 유엔군 군종장교는 총 140명. 그 중 13명의 군목이 전사했고, 26명은 부상을 입었다. 이번 사료전의 마지막 단계에는 이들 13명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의 군종제도는 어떤 모습일까.

현재 군종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들은 총 44개국. 그 중에서도 영국의 군종제도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509년 군종신부가 32명이었고, 1620년에는 연대단위까지 배치됐다. 이후 찰스6세는 군목제도를 더욱 확대 실시했고, 16세기 이후에는 더욱 많은 성직자가 종군하게 됐다. 영국의 군종제도는 직업군종제도로, 대위에서 소장까지 계급을 갖는 시스템이다. 영국 성공회, 천주교회, 기독교 성직자들이 임관할 수 있다.

필리핀은 천주교, 개신교, 이슬람교 3종파가 군종장교로 임명된다. 임관 자격은 대학 졸업 후 2년간 목회경력을 가진 자 중 해당 교구장의 추천으로 진급 없이 56세까지 종군할 수 있다.

미국의 군종제도는 군 창설과 함께 시작됐다. 1775년 군대를 조직할 당시 5개의 병과 중 하나가 군종병과였다. 이는 당시 의용군으로 조직된 병사들이 자기 마을의 목사를 모시고 전쟁터에 나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육군 1500여 명, 해군 900여 명, 공군 500여 명의 군종장교가 활동하고 있다.

군종목사의 오늘
이번 행사를 준비한 국방부 군종과의 중령 황성준 목사는 “정전60주년을 되돌아 봤을 때 군종병과에 대한 역사적 행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고비와 어려움마다 십자가를 가슴에 품은 군종목사의 기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현 군종장교들은 각 군에서의 예배인도는 물론 장병들의 가슴 속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상담역할, 전방에서는 각 초소를 돌며 위로하는 일까지 많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업무의 양이 많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오늘도 장병들에게 나아간다.

이날 자리에 참석한 특전사 사령부 중령 민상기 목사는 “6.25전쟁과 함께 시작된 군종장교들의 활동을 다시 되새길 때”라며 “앞으로 군종장교들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무사히 귀환하기를 기도하지 말고, 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 전쟁에 참전하기 전 어느 한 군종목사가 남긴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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