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제주 ‘영혼의 섬’ … “참말로 좋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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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제주 ‘영혼의 섬’ … “참말로 좋수다”
  • 표성중 기자
  • 승인 2013.07.17 12: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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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순례길 ‘4코스’ 완공 … 푸른 제주에 깃든 선배들의 신앙과 삶 체험

▲ 최근 한국크리스천기자협회에 소속된 17개 회원사 기자들이 '화해의 길을 걷다'를 주제로 여름신앙수련회를 제주도에서 개최했다. 기자들은 제주 순례길을 걸으며 푸른 제주에 깃든 신앙선배들의 삶과 역사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했다.
바람, 교회 종소리 좇아 뚜벅뚜벅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 유일한 특별자치도, 불과 물이 빚어낸 세계적인 화산섬, 천혜의 자연경관이 수려한 세계적인 휴양섬. 바로 제주도다. 바로 이 제주도에 또 하나의 멋진 길 ‘기독교 순례길’이 열렸다. 제주CBS와 제주관광공사가 손을 잡고 만든 이 기독교 순례길은 종교인뿐만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새로운 테마 상품이 되고 있다. 기독교 순례길을 걸으며 제주 지역 초기 신앙인의 삶과 역사를 만나는 시간 ‘영혼의 섬’ 제주를 다시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올 여름 제주도로 휴가계획을 세웠다면 자연풍경에 취해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묵상하며, 갖은 핍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던 제주 신앙 선배들의 삶을 느껴보자. <편집자 주>

# 제주선교의 시작 성내교회
1907년 한반도 북쪽 평양과 원산을 중심으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해 9월 17~19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조선 7명이 장로교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고 전국 각지로 파송된다.

그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는 선교의 불모지인 제주도로 갈 것을 자원했다. 이기풍 목사가 최초로 제주도에 세운 성내교회. 1917년 4월 1일자 제1회 당회록 서문에는 ‘1908년 2월부터 성내교회가 설립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성내교회 성립과 더불어 남녀소학교가 설립됐으며, 당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남강 이숭훈, 박영효 대감 등의 지원으로 1910년에는 영흥사숙, 영흥의숙으로 발전했다. 영흥의숙과 모슬포교회 부설 광선의숙은 제주도 최초의 남녀공학이었으며, 민족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

1924년 제주성내교회는 제주도 최초의 중앙유치원을 창설했으며, 중앙유치원은 동, 서부교회 분립 후 동부교회로 이전했고, 지금도 동부교회가 운영하고 있다.
 
▲ 금성교회 예전모습(왼쪽)과 현재모습(오른쪽)
# 금성교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한 조봉호 선생이 청년 시절에 다녔고, 4.3사건 당시 순교한 제주출신 첫 목사 이도종 목사가 어린 시절에 다니던 교회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7명 가운데 한명인 평양 출신 이기풍 목사가 제주시 성내교회에서 전도를 위해 이곳으로 와 조봉호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1924년에 초가 예배당을 짓기 전까지 조봉호, 이덕련(이도종 목사 부친) 집 등에서 예배를 드렸고, 현재의 예배당은 1990년대 지은 것이다.

▲ 협재교회 종
# 협재교회
1921년 당시 협재리는 300여 세대가 살고 있는 매우 큰 마을이었지만 토속신앙이 많기로 유명했다. 당시 모슬포교회 최정숙 집사가 자비로 전도인을 파송하려고 물색하던 중 금성교회 이도종 청년이 전도인의 자격이 있다는 주위의 추천을 받아 그를 복음의 황무지인 협재리에 파송했다.

1948년 4.3사건 당시 예배당이 소각돼 개인주택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53년 피난민들의 도움으로 현재 예배당 터에 예배당을 신축했고, 이후 증개축을 통해 지금의 예배당으로 발전했다.

▲ 이도종 목사 순교비가 세워진 대정교회 마당
# 대정교회
제주교회사에 있어서 제주출신 1호 목사이며, 1호 순교자가 된 이도종 목사(1892~1948)의 유해와 순교기념비가 봉안돼 있는 제주 기독교 순교성지이다. 이도종 목사는 1908년 이기풍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했고, 평양숭실학교 유학 후에 전도인으로 협재교회를 개척해 전도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일제 치하 순국지사 조봉호 선생과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 비밀결사로 조직된 독립희생회 제주지부를 결성해 중국 상해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후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이다 큰 옥고를 겪었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시국 강연 등으로 많은 고초를 겪은 독립운동가이며 국가유공자로 알려져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대정교회를 ‘이도종 목사 순교성지’로 공식 지정했으며, 현재 교회 마당에는 순교한 이 목사의 유해와 김도전 사모의 유해가 함께 화장돼 봉안비 아래 모셔져 있다. 봉안비 옆에는 대정교회 성도들이 산방산돌을 가져와 이 목사의 사랑과 헌신, 순교를 기념하며 직접 글씨로 새긴 기념비와 제주노회에서 설립한 순교기념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 모슬포교회
# 모슬포교회
1909년 9월 1일 이기풍 선교사에 의해 세워졌으며 1914년에 부임한 윤식명 목사에 의해 초석이 다져졌다. 윤 목사는 1918년 전도여행 중 태을교도들에게 폭행을 당해 왼쪽 팔을 잃었지만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었다. 제주 4.3 당시 자수권유를 통해 3천 명의 양민을 살려낸 조남수 목사도 1947년부터 1960년까지 모슬포교회를 시무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는 지난 2006년 모슬포교회를 유적 교회로 지정했다.

# 진개동산 공덕비
대정읍 하모리 진개동산에는 마을 주민들을 살리는데 공이 많았던 문형순 경찰서장과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가 있다. 4.3이 발생한 이후, 낮에는 경찰과 서북청년응원대가 마을에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사람을 죽이고, 밤에는 공비들이 내려와 힘없는 민중을 살해하는 등 무고한 주민들을 향한 집단학살이 끊임없이 이어져 도민들에게는 생지옥과도 같았던 고통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놓고 학살의 현장에 직접 뛰어 들었던 이가 당시 모슬포교회를 담임했던 조남수 목사였다. 조 목사는 당시 문형순 경찰응원대장과 “이런 식으로는 제주도민이 다 죽는다, 근본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수하는 사람은 죄의 유무를 불문에 붙여 목숨을 살려줘야 한다”며 담판을 짓고 자수강연을 시작했다.

대정지역과 한림, 화순, 중문, 서귀포에 이르기까지 150여 회의 강연을 통해 3천여 명의 사람들이 자수하면서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자수자들 중 자수하는 바람에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됐다는 유가족들의 주장으로 인해 그 평가가 다소 엇갈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담보하는 순교의 정신은 아픈 역사를 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다.

▲ 이도종 목사 순교터
# 이도종 목사 순교터
이도종 목사는 제주 4.3 사건 직후 삼엄한 상황에서 1948년 6월 교인 심방을 위해 대정교회를 향해 가다가 무릉2리 인향동 인근에서 무장대에 붙잡혀 솔밭 구덩이에 생매장당했다. 이 목사는 죽음의 순간에도 복음을 증거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 목사의 시신은 1년이 넘게 발견되지 않았다가 한 무장대의 증언으로 알게 됐다. 이도종 목사는 이죽음으로 인해 제주도 목회자 천 순교자로 기록됐다.

* 제주 순례길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제주CBS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스마트폰 앱스토어에서 ‘제주 순례길’ 어플을 다운받으면 된다. 제주 순례길의 자세한 코스를 상세히 안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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