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취재-‘탈북 고아’ 강제북송 절박했던 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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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취재-‘탈북 고아’ 강제북송 절박했던 4주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3.06.05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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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생존만이 전부였던 ‘꽃제비’들에게 꿈을 주었다

3주간 도망칠 기회 많았지만 한국대사관 믿고 기다려
성경책 품고 잡혀간 아이들 ‘정치범’으로 곤혹 치를까 우려
탈북 고아 하나님이 보내시는데 누군가 도와야만 한다

4월 말 시작된 탈북여행.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한 달만 고생하면 닿을 수 있다던 꿈의 나라 한국. 그러나 이들을 기다린 것은 북으로의 ‘강제송환’이었다.

지난달 28일 라오스에서 북한으로 압송된 탈북 ‘꽃제비’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라오스 국경수비대에 붙잡힌 후 이민국에서 보낸 약 열흘간의 시간, 아이들은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주라오스 한국대사관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믿고 아무 의심 없이 남아 있었다. 한국으로 가게 됐다며 인사를 나눈 지난달 27일. 그러나 그들은 돌아올 수 없을 길로 떠나고 말았다.

9명의 탈북 청소년 강제북송 소식이 알려진 것은 지난달 28일 이미 중국을 통해 평양으로 압송된 후였다.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3년까지 중국에서 한 선교사 부부를 만나 신앙을 키워왔던 아이들. 그들의 삶에 동행했던 A장로는 “강제송환 소식을 접하고 며칠은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중국 공동체 생활을 후원하고 라오스로의 탈북여정을 문자메시지와 이메일로 동행한 A장로를 만나 생생한 상황을 들어 보았다.

라오스행 한 달 피말리는 순간

주모 선교사가 청소년들의 한국행을 결심한 것은 지난 4월 말. 4월 29일, 남으로의 ‘여행’(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이들은 여행이라 부른다)은 시작됐다. 여행 중 가장 긴장을 늦출 수 없던 순간은 중국 내에서의 이동. 최근 탈북자들에 대한 단속이 심해 일행들은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열흘 남짓 이동을 마친 아이들은 라오스 국경에 도착했다. 합법적 신분을 가진 선교사 부부는 잠깐 아이들과 헤어졌다. 다시 만날 곳을 정한 후 검문소를 통과했다. 그렇게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서야 라오스 우돔사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한국 대사관이 있는 비엔티안.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수비대의 검문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선교사는 “한국에서 단체 관광을 왔다”고 해명했다. 아이들 역시 단체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국경수비대는 여행사 관계자와 통화를 요청했다. 결국 선교사는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고, 수비대와 통화한 대사관 직원은 “저쪽에서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차라리 북에서 왔다고 하라”며 추후를 도모했다. 중국만 넘어서면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오스에서 예상치 못한 검문에 처하고 이들은 5월 10일 처음으로 억류됐다.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 A장로는 “말이 억류지 아이들은 자유로웠다. 우돔사이 내에서 체류와 이동이 가능했다. 닷새 정도 이곳에 머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선교사의 어머니와 대사관 사이 연락이 오갔다. 대사관에서는 “잘 될 것이니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선교사가 직접 식자재를 구입해 아이들을 먹였고, 중간 중간 A장로에게 전화로 상황을 보고했다.

15일, 라오스 측에서는 한국대사관에 데려다 주겠다며 이동을 요청했다. 수도까지 가는 경비는 일행들이 직접 내라고 했다. 선교사는 곧장 한국으로 연락해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그런데 도착한 곳은 대사관이 아닌 ‘이민국’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도 이민국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오랜 여정에 탈이 난 선교사와 아이들은 주말이면 기도와 찬양으로 하루를 보냈다. 라오스에서 억류된 3주 간 아이들은 예배를 통해 위안을 얻었다.

이민국 수감 중 한국어를 사용하는 남자 두 명이 조사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북한 사람 같다”고 의심했다. 이들은 “한국으로 가도 북으로 다시 오는데 너희들은 왜 한국으로 가려고 하느냐”며 회유하기도 했다.

선교사는 이런 상황을 즉각 대사관에 알렸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마음이 급한 선교사는 도심 지도를 그려주며 아이들에게 만약의 상황에 처하면 ‘미국대사관’으로 도망가라고 일렀다. 이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바로 미대사관이 있었던 것.

24일 다시 조사를 시작하던 남자들은 아이들에게 자필로 이름을 쓰게 했다. 그 후 라오스 이민국이 돌변했다. 아이들을 억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27일 점심식사 후 “한국으로 간다. 준비하라”는 짧을 말을 나눴다. 선교사는 아이들과 기쁨을 나누며 함께 예배드리던 성경과 묵상집을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 역시 기쁜 마음으로 짐을 챙겼다. 그리고 나서 선교사 부부는 억류됐고, 아이들은 강제 호송됐다.

A장로는 “도망갈 기회가 많았는데, 대사관의 말만 믿고 기다린 것이 문제였다”며 속상한 마음을 드러냈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행으로 알고 성경책까지 챙긴 아이들이 북한에서 정치범으로 곤혹을 치를까 하는 우려였다. 아이들을 정치범의 잣대로 다룰 경우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A장로는 서둘러 이 사실을 한국 언론에 알렸고,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생존만을 위해 버틴 ‘꽃제비’들

9명의 탈북 청소년들은 어떤 생활을 했을까. 일본 납북자의 아들로 추정되는 한 명을 제외한 8명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거지’였다. 북한 장마당을 떠도는 거지를 일컬어 ‘꽃제비’라고 부른다. 이미 북한에서 부모를 잃었거나 버려진 아이들이었고, 생계를 위해 국경선을 넘은 아이들이었다.

탈북청소년 공동체를 꾸려온 주 선교사는 장백을 누비며 아이들을 찾아내곤 했다. 도둑질과 구걸로 연명하는 아이들에게 “함께 살자”는 말을 건넸다. 이들의 사역은 벌써 5~6년이 넘어섰다. A장로는 이들과 지난해부터 인연이 닿았다.

“저는 7살에 실명을 해서 불빛도 감지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런 저에게 어느 날 참 빛이 비추었어요. 그 빛 안에는 신기하게 뜨거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뜨거움을 알리고자 중국으로 찾아갔어요. 아이들을 만나 그 빛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A장로는 매일 아이들의 모습을 손으로 익혔다. 지난해 부활절 처음 방문한 후 성탄절에도 함께 했다. 아이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성경을 암송하며 찬양을 불렀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아이들이 부른 찬양 녹음파일을 다시 들으며 기도했다.

“아이들의 실상을 보지 않고는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것이 성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당연히 그들을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우니까요.”

처음 공동체로 들어온 꽃제비들은 하루에 7~8끼를 먹어댄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며 일주일간 허기만 달랜다. 거리에서 아무 음식이나 집어먹은 아이들의 뱃속은 곯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데려와 씻기고 품고 기도하며 가르쳤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암송시키며 하나님을 전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루하루 변해갔다.

“지난 성탄절 중국에서 아이들을 만났을 때, 로마서를 암송하고 있었어요. 정말 은혜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양육된 아이들이 한국에 적응할 수 있을 때쯤 국경을 넘어 탈북이 시작된다. 중국을 벗어나 라오스를 통해 한국이나 미국으로 넘어가는 것.

아이들은 한국에서 가질 꿈을 이야기했었다. 박광혁 군은 카레이서가 꿈이라고 했다. 광혁이는 중국에서 3년이나 살았다. 한국으로 올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한다면 여기 엄마 아빠(선교사 부부) 곁에 남겠다”고 했다. A장로는 “그런 아이가 다시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북받쳤다”고 말했다.

문철 군은 발가락이 없다. 고된 탈북생활로 발가락이 모두 썩어 떨어져 나갔다. 누가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 거리를 전전하다 죽어버릴지도 모를 아이들이었다.

주 선교사는 “이 아이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셨는데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수차례 이야기 했다.

“라오스 이민국에 잡혔을 때 너무 쉽게 한국에 들어오면 아이들이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지 못할 것 같아서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시나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견딜 만큼의 어려움만 달라고 기도했었죠. 나머진 하나님께서 모두 막아달라고 매달렸죠. 그런데 아이들이 다시 북으로 끌려가다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북한선교 하나님이 주신 사명

강제북송 소식을 접한 A장로는 사흘 동안 기도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눈물만 쏟아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하나님의 진행하심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기도를 다시 이어갔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한 A장로는 한국 교회에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탈북 청소년들을 돕는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인데 이들을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는 이념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북한 정권과 그 고통에 매여 사는 사람들을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한정권이 싫다면 고통받는 백성들이 탈출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핑계와 변명을 먼저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A장로는 북한 정권과 대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대북 지원론을 펴는 진보진영에도 따끔한 한 마디를 남겼다.

“대북 지원은 강조하면서도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보살피지 않는 것도 역시 이념의 잣대”라며 “남북 갈등이 아무리 심해도 탈북 고아들을 위한 사역은 중단되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90년대 말까지 교회가 관심을 가졌던 북한선교가 침체에 빠진 것 역시 한국 교회가 과시적 선교에 집중한 이유였다. 탈북자 선교사역은 ‘익명성’이 중요하고 선교 실적을 보고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을 내세워야 하는 한국 교회의 현실에선 탈북자 사역은 매력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A장로는 “아직 휴대전화에 아이들이 부르던 찬양이 남아있다”며 “아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교회에 회개의 영이 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희생을 통해 무언가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 않을까 기도합니다. 저에게 있는 아이들의 음성파일….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가 한국 교회에 널리 알려지길 소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절 말씀을 붙들고 사명의 부패와 변질을 경계하며 탈북 고아들을 섬기는 A장로. 라오스로 탈북 과정에 함께 한 주 선교사 부부. 모두 하나님이 통일을 위해 예비하신 일꾼이다. 그리고 선교사의 말처럼 하나님이 보낸 이들을 한국 교회가 외면하는 일이 없도록 보다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북한선교 사역이 요청된다.

A장로는 “라오스 탈북 청소년 강제 북송사태를 통해 한국 교회가 보이지 않는 섬김에 적극 나서주길 바란다”고 거듭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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