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 다시 찾은 난곡…“모두 희망을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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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다시 찾은 난곡…“모두 희망을 노래한다”
  • 승인 2003.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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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쌓여있는 건물 잔해. 이를 가득 싣고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트럭. 반쯤 부서진 가옥. 꼭 1년 만에 다시 찾은 난곡의 모습은 마치 민둥산 같았다. 어깨를 맞댄 듯 다닥다닥 붙어 있던 수많은 집들은 오간 데 없고 무너진 집들의 건축 더미들만 작은 언덕을 이룬 채 남아 있었다.

비록 30여 채의 세대가 남아 있지만 실제 생활하고 있는 가정은 15가정 정도. 지난 9월까지 1백여 세대가 남아 있었으나 10월부터 철거가 본격화되면서 이제는 10여 가정만 남았다.

건물들이 없어 남아있는 집들은 쉽게 찾을 수 있었으나 사람이 살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언덕을 따라 오르내리길 30여 분. 형체가 남아있는 한 집을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쿠쿵’하면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기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문을 두드렸다. 얼굴을 살짝 내밀며 조심스럽게 문을 연 사람은 아직 앳딘 얼굴의 여대생같았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문은 닫혔고 잠시 후 점퍼에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난곡에서 20여 년 동안 생활을 해 온 전모(48)씨는 며칠 전 바로 옆집마저 눈앞에서 강제철거 당하는 모습을 목격해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정부에서 1천만원 신용대출을 해 준다 해도 그 돈으로 어디 갈 데가 없어요. 그 돈으로는 또 다시 무허가 건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무허가 건물로 입주하면 대출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8평 남짓의 집에서 아버지와 딸 두 식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질문에 씁쓸한 웃음만 보이던 전씨가 “딸에게 새해에 아버지께 바라는 것을 한번 들어볼까요?”라는 질문을 꺼내자 처음으로 소리를 내고 웃는다. “바라는 게 뭐가 있겠어?”라고 말하지만 어느 새 출입문을 열고 딸을 불러내고 있었다.

22살의 딸은 쑥쓰러운지 끝내 입을 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우리 딸이 지금까지 때 묻지 않고 잘 자라줘서 너무나 고마워요. 올해는 좋은 사람 만나 시집 잘 갔으면 좋겠어요. 그게 가장 큰 바램이에요.”

아쉬운 전씨의 바램을 등 뒤로 ‘건물 잔해 언덕’을 넘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3분 가량 걸었을까? 한 아주머니가 손에 무엇인가를 든 채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뛰어가 보니 호박 껍질을 기르던 토끼에게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근심과 고통이 배어있었다. 몇 번의 인터뷰 거절 끝에 집까지 쫓아간 기자가 불쌍해 보였는지 아니면 하소연을 하고 싶었는지 “들어오긴 해 보쇼. 험한 말 들어서 뭣할려고….”라며 일단 집으로의 출입을 허락했다.

그녀는 앉자 마자 ‘어휴∼’하며 깊은 한숨부터 터뜨렸다. “며칠 전 당분간 강제철거를 하지 않기로 했던 뒷집을 허물어 항의를 했죠. 이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는데 결국 몇 명의 건장한 청년들에 의해 패댕이쳐지고 말았어요.

허리와 어깨 등을 다쳐 전치 3주 진단이 나왔지만 병원비는 커녕 ‘미안하다’는 사과조차 듣지 못했어요.” 이씨 아주머니의 두 뺨에는 어느 새 주루룩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두 아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젊은 혈기에 싸우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그냥 넘어져서 병원에 다녀왔다고만 했죠.” 그녀는 계속해서 ‘돈 없는 사람만 억울하다’는 말과 한숨만을 몰아쉬었다. 이씨 아주머니의 집에는 몇 마리의 가축이 있다.

개 한 마리, 토끼 두 마리, 거위 두 마리 그리고 오리. 이 동물들은 그동안 정답게 얘기나누던 이웃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씨 아주머니가 얼마 전부터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낮에는 얘기 나눌 사람이 없어요. 그나마 이놈들이라도 있으니 정붙이고 살죠. 바램이라면 그저 내년에도 두 아들 모두 건강하게 돈 잘 벌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게 가장 큰 바램이에요”라며 소박한 희망을 내비췄다.

그리고 다른 가족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함께 방문한 집은 약 60도 가량의 경사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천정까지 쌓인 박스와 정리된 그릇 등이 눈 앞에 펼쳐졌다.

식사를 하던 그들은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한 술 뜨라며 선뜻 밥을 건넸다. 그러나 철거 얘기가 나오자 마자 식사는 중단됐다. 그러나 그 부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재기의 꿈을 키워가는 곳인 ‘난곡’이 없어진다는 데 더 큰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모(52)씨는 “참 재미있게 살던 곳이었는데…. 말 그대로 ‘정’이 살아있던 곳이었죠. 어느 집 아이던 상관없이 식사를 못했으면 먹여주고, 아프면 약 사주고 소위 ‘계산’된 행동은 찾아보기 힘든 동네였어요. 이런 동네를 없애다니.

이제 기억 속에만 남게됐네요”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내인 이모(46)씨도 “이제 이곳에는 불신과 악만 남았어요. 돈 몇 푼 더 받으려고 이웃끼리 속이고 헐뜯고…. 정부가 정말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수준에 맞게 살 곳이 필요한데 말이죠.

‘문도 잠그지 않고 다니던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동네’는 이제 막을 내렸어요”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들은 오는 13일 난곡 인근의 먼 친척 집으로 들어가 살기로 했다. “그것도 잠시죠. 언제까지 얹혀 살 순 없잖아요. 그래서 막막하긴 마찬가지에요.

다만 내년에는 일이라도 많아져서 돈이라도 꾸준히 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참 여덟살 된 우리 늦둥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도 바램이라면 바램이죠.” 짧은 시간 정이 들었을까? 백씨 부부와 이씨 아줌마와의 이별이 조금은 힘들었다. 부부는 대문까지 나와 잘가라는 인사를 다정하게 건넸다.

다시 사람들을 찾아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허허벌판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쇠통에 장작나무를 태우며 몸을 녹이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갔다. 낡은 소파 6개, 의자 1개, 밥상 2개, 이불 4조, 두루마리 휴지 1개, 가스렌지 1개 , 개 5마리 그리고 된장과 고추장이 담긴 장독 3개. 이것이 전부였다.

이 또한 이사 간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을 주워 재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며칠 전 강제철거를 당해 길거리로 내몰렸다. 당장 갈 곳도 없어 길 한 가운데서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식사는 동사무소와 몇몇 돕는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쌀로 해결하고 있다. 반찬은 김치가 고작이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먹을 물도 없다. 먼 곳에서 물을 길어 와 끓여 먹는다. 어제는 바람을 막아주던 천막까지 철거당했다.

불을 쬐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성할리가 없었다. 대부분 감기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한 노인은 중풍이 걸려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태에서 강제 철거를 당했다. 모두 20여 가정이 노상생활을 하고 있으며 전혀 이사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이들에게서 새해의 소망을 듣기란 참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적인 바램에 목소리를 모았다. “내년에는 어디든 전셋방이라도 얻었으면 좋겠어요. 자식들마저 고생시킬 순 없잖아요. 하루빨리 사태가 해결돼 다시 가정의 모습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찬바람에 눈마저 뿌리던 지난해 12월28일. 집들이 빼곡했던 난곡은 꼭 1년 만에 민둥산으로 전락했고 다정다감했던 주민들 대신 중장비들과 트럭들만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희망이 싸늘히 식은 곳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희망’은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자녀의 결혼·직장·건강 그리고 전세방. 그리 대단한 바램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난곡 주민들에게는 이 일상적인 바램들이 2003년 한해 소망 중 가장 간절한 것이다. 계미년(癸未年)에는 난곡에 살았던 모든 주민들이 따뜻한 방에서 행복한 웃음소리를 꽃피우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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