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순교장소 위해 세워진 세 샘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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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순교장소 위해 세워진 세 샘터교회
  • 승인 2002.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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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궁전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받았던 인상이 너무도 강렬했었던 탓인지 광장 뜰을 빠져 나왔어도 두 망막 속에 깊이 새겨진 수많은 장면들은 한 동안 머릿속에서 비디오 필름처럼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귀한 예술품들의 화려함과 위압적인 교황청의 건축물들이 오히려 마음속을 무겁게 짓누르면서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루터가 성스런 계단(Scala Santa)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ꡐ파테르 노스테르ꡑ(Pater Noster)를 암송하다가 벌떡 일어났을 때 느꼈던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답답한 것이 아니었을까?

바울이 처형되었던 장소 세 샘터 교회
바티칸 교황청을 쫓기듯이 빠져나온 우리 일행은 바울이 순교했던 지점에 세워졌다는 세 샘터(Tre Fontana) 기념 교회를 향해 서둘러 달려 나갔다. 창가 너머로 특이한 옷차림을 한 집시 남녀들이 가끔 손을 흔드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동구라파의 집시들처럼 집단생활을 하면서 그늘진 뒷골목의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그들은 로마의 현대 문명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사생아일른지 모른다.

누군가가 로마에서 돈이나 물건을 도적 맞거나 강탈당한 적이 없다면 이태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충고한 적이 있다. 사실상 이태리는 국민의 대다수가 카톨릭 신자들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카톨릭 교회의 총본산이지만 마피아와 같은 암흑 조직이 날뛰고 있고 범죄율도 거의 세계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가장 추한 것이 된다고 했던가! 이태리 로마의 두 야누스 얼굴은 믿음의 의미가 급속도로 변질되어져 가는 현대인에게 던져주는 차라리 충격적인 메시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한참을 달려가던 버스는 로마 서쪽에 있는 성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아름드리 정원수로 뒤덮힌 교회 뜰 안으로 들어서자 오랜 세월로 빛 바랜 회색 건물 하나가 낡은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하였다.
세 샘터 교회 안은 대낮이었는데도 어둑컴컴했고 음산한 분위기가 방안 곳곳에 물씬 배어 있었다. 건물 안벽에는 사도 바울이 목 베임을 받던 순간의 섬뜩한 장면과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베드로의 처참한 모습이 부조 형식의 조각품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한 쪽의 빈 공간에는 참수 당할 때 그의 목을 얹어 놓았다는 받침대와 머리가 세 번 튄 곳에서 솟아 나왔다는 샘터들이 보존되어져 있었다.

사도 바울이 순교한 시기에 대해서는 주후 67년(유세비우스), 68년(제롬) 등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둘 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네로 박해 시에 로마의 포룸 근처에 있는 마머틴 감옥에 갇혔다가 이 곳 세 샘터에서 목 베임을 당했으며 시신은 성 밖 퓨오리데 뮤라(지금의 성 바울 대 성당)에 묻혀졌다고 한다. 대 성당 마당에는 야자수 네 그루가 있고 그 앞에는 왼 손에 긴 칼을 들고 머리를 깊이 숙인 바울의 모습을 새긴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울이 굳게 붙잡고 있는 칼은 정의와 확신을 의미하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깊이 고뇌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마지막 순교 장면
로마의 클레멘트(A.D. 95년)는 그의 서신에서 바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ꡒ마침내 바울은 승리의 면류관을 썼다. 일곱 번 고랑에 채워졌고 도망자가 되었으며 돌에 맞으면서 헤롯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활동하는 사이에 바울은 영광스런 신앙의 명예를 얻었다. 그는 전 세계에 의를 가르쳤고 권력자 앞에서 신앙 고백을 내어 보이고 그 후 세상에서 해방을 받아 하늘나라로 올리웠다.ꡓ

여위고 구부러진 다리에 곱슬머리와 대머리, 매부리코를 지니고 있었다(바울행전)는 바리새파의 유대인 바울, 다메섹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가 너무나도 좋아서 온 생애를 내던져 온갖 핍박과 고난까지 기꺼히 받으려 했던 다소의 복음 전도자 바울, 죽음의 날을 앞두고 가죽 종이에 쓴 성경과 외투 한 벌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히브리의 영웅 바울, 그의 육신은 예리한 칼날에 목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싸늘한 시체가 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의 행적을 기록한 사도행전 28장도 순교의 붉은 핏방울로 마침표가 찍혀졌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 역사는 바울이라는 이름 두 자를 빼어 놓고는 그 흐름의 방향과 목표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할 만큼 그는 실로 B.C.와 A.D.의 역사 전환기에 기독교의 뉴 프런티어 역할을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수행한 최고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바울은 나사렛 예수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려면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로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떠하든지 로마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간절히 구하였지만(롬 1:10) 그 때마다 사탄이 그 앞을 가로 막았다(살전 2:18).

가난한 복음 전도자였던 바울이 로마로 가려면 무엇보다도 엄청난 배삯과 살기등등한 유대인들의 칼날을 막아줄 수행원들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호송됨으로써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비록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서 끝내 순교의 제단에 관제처럼 부음이 되었지만, 그의 놀라운 선교의 꿈은 정녕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영광의 금 면류관을 쓰고 천국에서 환하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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