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운동 수감자 중 22.4%가 기독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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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운동 수감자 중 22.4%가 기독교인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3.02.20 1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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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3.1만세운동과 한국교회의 기여

연중기획 / 위기에서 희망으로, 교회가 이웃이다-2

3.1만세운동 전후 기독교의 조직력 독립운동에 적극 활용
민족의 이웃 자청한 교회, 탄압 두려워않는 믿음으로 저항

본지는 공공성 회복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2013년, ‘위기에서 희망으로, 교회가 이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이웃의 발자취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교회들이 여전히 약자의 편에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3.1절을 앞두고 일제 치하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인의 역할과 교회의 희생에 대해 다룬다. <편집자 주>

 

대한문 앞 3.1만세운동 전경.

교육시설을 세우고, 신문을 창간하며 민중계몽에 나선 기독교는 1884년 복음이 들어온 후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약 30여 년 동안 ‘사람’을 키우는 일에 집중했다.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에게도 신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 결과는 3.1운동 전후 나타난 다양한 사건 속에서 확인됐다. 만세운동의 배후에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여성’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교회 여전도회 조직을 중심으로 민족운동의 열기가 확산되어 갔다는 점이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이후 이에 호응한 각계각층의 참여로 거의 1년 가까이 지속된 대규모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총칭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열강의 묵인과 협조 아래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이어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했다.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을 강요하여 한국 식민지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일본에 대해 순응할 민족이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폭압의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이에 저항하는 식민지 민중들의 항일의식과 항일 에너지는 증폭되어 갔다”고 평가했다.

제도와 생활을 무력으로 철저히 통제했을지는 모르지만 한국 민족의 의식만은 일제의 지배와 통치를 받지 않았다. 그 이면에 한민족의 정신을 지배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종교가 담당했고, 외래종교였던 기독교도 애국 민족종교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기독교는 당연히 일본에게는 위압적인 종교였다. 105인 사건 등을 통해 기독교는 이미 일제의 관리 대상이었다. 일제는 기도회와 예배를 방해하고 교회 출입을 간섭했다. 종교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심각했다. 이러한 탄압은 종교계가 만세운동에 나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의 조직력은 3.1운동을 주도하는데 상당히 큰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선정한 ‘한국 교회사 100장면’에 ‘3.1운동과 한국기독교’도 자랑스러운 역사에 포함되어 있다. 교회협은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에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포진되었다는 점과 기독교인들이 한국 독립에 대한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킨 점, 여성들의 인권이 척박한 상황에서도 기독여성들이 3.1운동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 등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3.1운동에서 기독교의 공헌은 어느 정도였을까. 기독교 역사가들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초기 조직화 단계의 거의 모든 흐름에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민중운동화 단계에서도 교회는 전국의 조직과 지도자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조직과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다면 3.1운동의 신속한 확산과 장기적 지속은 어려웠을 것이란 설명이다. 이에 대한 증거로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경상도, 함경도, 전라남도 등 거의 모든 지역의 최초 독립선언식과 시위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역사 자료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독립선언문에 서명하지 않은 15명을 포함해 총 48명의 민족대표 가운데 2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오산학교 설립자 이승훈 장로와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종교교회 오화영, 원산상리교회 정춘수 목사 등은 상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과 ‘2.8독립선언’ 소식을 들은 후 만세운동을 준비하며 천도교와 함께 민족연합전선을 구성했다. 민족대표 48인에는 27세에 불과한 연희전문학교 3학년의 장로교 신도 김원벽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월 한 달간 일어난 만세시위가 848건에 달했다. 시위 인원은 연인원 60만 명이었다. 만세운동으로 수감된 9000여 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2.4%로 가장 많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회의록에도 3.1운동으로 인한 교역자들의 피체와 투옥이 보고됐다. 당시 체포된 성도는 모두 3,804명이고 이 중 목사와 장로가 134명, 기독교 관계자로 체포된 지도자가 202명, 감금된 남자 신자가 2,125명, 감금된 여자 신자가 531명, 사살된 자 41명 등이었으며 파괴된 교회당이 12개에 달했다. 당시 기독교인 비율은 전체 인구의 1.8%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놀라운 희생이 아닐 수 없었다.

기독교의 역할이 만세운동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만세운동이 소강국면에 들어갈 즈음, 기독교인들은 시위운동에서 축적된 대중운동의 역량을 발휘해 독자적인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교회사 100장면에 정리된 ‘3.1운동과 한국기독교’에는 “비밀결사의 주된 목적은 상해 임시정부와 통신하고 국내에서 의연금을 모집해 상해로 전달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기독교인들은 한국독립에 대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재외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이 전개된 것이다. 서재필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인자유대회’를 열고 일본의 학정을 폭로하며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렸다.

3.1운동을 이야기할 때 ‘유관순 열사’가 떠오르는 것은 기독여성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16살 어린 소녀의 몸으로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이끈 유관순 역시 이화학당 학생이자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 신여성이었다. 당시 이화, 정신, 배화학교 등 기독교계 여학생들에게는 독립운동 권유가 있었고, 비밀리에 3.1운동 준비가 시작됐다. 교단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조직력을 갖춰 나가던 기독여성들은 만세운동이 소강국면에 들어갈 무렵, ‘대한애국부인회’를 결성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제3의 독립 주체로 제 몫을 감당해왔다.

교회가 정착한지 불과 3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독교는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3.1운동 직후 기독교는 교회폐쇄와 성도수 감소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민족 종교로서 탄압받는 민중들의 지도자로, 그들의 아픔을 나누는 ‘이웃’으로 십자가정신을 발휘했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는 “옛날 국가가 힘이 없던 시절에는 교회가 중심적 역할을 감당해왔다”며 “기독교만큼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간여한 종교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해방 이후 건국에 있어서도 자유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 선 것이 바로 기독교”라며 교회가 고난받는 민족의 ‘이웃’이었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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