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회심 후 금욕과 수사생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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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 회심 후 금욕과 수사생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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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2.0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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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27)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

▲ 백석대 역사신학
서방교회 신학을 위하여 초대교회와 중세교회 역사의 기점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54년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기초교육을,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공부하였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사생활이 건전하지 못했다. 370년에 혼외결합으로 아들 아데오타투스(372-390)를 낳았다.

또한 373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빠졌다. 이 시기에 그는 스토아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배웠다. 376년부터 383년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카르타고에서 오늘의 대학에 준하는 7학예를 공부하였다. 진리를 추구하던 그는 382년 카르타고에서 마니교 감독 파우스트와 친분을 맺었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가 자신에게 대답을 주지 못함을 보고 멀리하였다.

383/4년 로마에서 수사학 선생을 하려고 방문했었으나 로마의 쉼마쿠스의 소개로 밀라노 황실관련학교에 수사학선생이 되었다. 잘 알려진 대로 그곳에서 그는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게 되었고 차츰 그리스도교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들과 친구 아뤼피우스와 카르타고에서부터 함께 왔었다.

386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에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토니오스의 생애’를 읽음으로 수사생활에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파혼하고 독신생활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의 알레고리적인 성경본문해석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정원에서 기도하는 중에 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그는 기도를 위하여 정원으로 나오기 전에 펴놓았던 성경을 들고 읽었다. 그는 로마서 13장 13절 이하를 읽으면서 회심을 하게 되었다.

회심을 하게 된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북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카시키아쿰에 여러 달 동안 머물면서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금욕과 수사생활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387년 부활절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통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교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스티아에서 어머니가 병을 얻게 되어 다시 로마로 돌아가 일시적으로 머물다가 388년 타카스테에 체류하였다. 그는 390년 히포 레기우스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396년부터 430년 그가 죽을 때까지 히포의 감독으로 헌신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을 395년까지, 감독 이전의 삶만을 쓰고 있는 이유는 그의 감독생활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드려진 삶으로 알았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신학을 그의 삶과 당대에 발생한 논쟁들을 수습하면서 주요하게 형성하였다. 우선 그가 진리를 추구해 오는 가운데 만났었던 마니교도들과의 논쟁(391-399)에서 잘못 배웠던 이원론을 극복하고 있다. 마니교는 이 세상의 시작을 선악의 두 축으로, 그리고 운명론적으로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세상을 오직 선만 있으며,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마니교의 운명론을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으로 극복하였다.

그는 도나투스 논쟁(401-403)에서 교회개념을 정립하게 되었다. 교회의 본질이 보편성에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진리가 일반성의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유일하게 구원을 주는 기관으로 보았고, 그것은 오직 성례공동체로써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금욕적 성화의 추구 안에서 경건한 행위의 공로를 강조하였던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그의 논쟁(412-418)은 인간이 무능함을 강조하고 원죄사상을 확립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게 되었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마니교와의 싸움에서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을 들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폈고, 논쟁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견해에서 혼선을 보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의 보완으로 예정론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상의 논쟁들과 관련 없이 그는 그밖에도 성경주석, 방대한 분량의 저작들을 통하여 그의 신학을 확립하였다. 339-419년 15권의 ‘삼위일체에 대하여’를 통하여 삼위일체 신학을 정리하였고, 410년 도시 로마가 고트족에 의하여 유린당하자 충격을 받고 413-426년 22권의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창조와 심판에 이르는 직선적 역사관을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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