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전설적 권위 위에 세워진 바티칸 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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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전설적 권위 위에 세워진 바티칸 시국
  • 승인 2002.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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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로마로 가는 날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옛 압비아 가도나 아드리아 뱃길을 통하지 않고 하늘에 뚫린 시원한 비행로를 따라 사도행전의 마지막 현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1만여미터 상공에서 내려다 본 이태리 반도는 퍽 인상적이었고 평온해 보였다. 때로 해안선을 따라 모래톱을 가진 섬들이 드문 드문 보이고 짙푸른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면서 육지로 밀려드는 정경이 마치 오래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뿌옇게 시야에 들어왔다.

언젠가 고린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사도 바울의 마지막 전도 여행길을 따라 이태리 브린디시로 왔던 적이 있었다. 그렇다. 저 거칠고 드넓은 아드리아의 푸르름 아래에는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려고 했던 사도들의 위대한 집념이 묵직히 가라앉아 있고 피보다 더 진한 순교의 열정이 뜨겁게 녹아져 있다.

한 때 프랑스의 천재 군인 나폴레옹은 총칼로 유럽을 장악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센트 헤레나에서 서글픈 종말을 맞이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거친 유라굴로 광풍에 밀리고 번득이는 박해의 칼에 쓰러지면서도 세계의 수도 로마에 입성했던 복음전도자들은 예수의 뜨거운 사랑으로 로마 제국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가서 그 곳에 영광스런 구원의 십자가를 꽂아 넣었다.

새 것과 옛 것이 공존하는 로마
아데네 공항을 떠난 지 1시간 반 여만에 우리 일행을 태운 알리타리아 비행기는 점차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로마에서의 일정에 대해 나름대로의 노선을 그려 보았다. 우선 바티칸에 들려야만 하겠고 그 다음에는 지하 무덤 카타콤,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바울의 순교 기념 교회 . 그러다 보니 어느덧 하루 일정이 완전히 채워져 버렸다.

시간이 조금만 더 허락된다면 뒤로 돌아서서 동전을 던져 넣으면 로마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트레비 분수, 고대 로마의 정치적 중심지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장), 1,600명이 한꺼번에 목욕할 수 있도록 건축된 카라칼라 목욕장, 거룩한 천사의 성이라고 불리우는 성 안젤로 성, 로마를 떠나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지점에 세워진 쿼바디스 교회 등도 한번쯤은 꼭 둘려야만 할 곳들인데, 오늘따라 조급하게 서둘러 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조금 밉상스럽게 보여졌다.

드디어 레오나르드 다빈치 국제공항, 삼색 이태리 국기가 펄럭이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새 로마는 활기찬 새 아침의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지만 옛 로마는 여전히 폐허의 터전 위에서 깊은 역사의 잠을 계속 자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붉은 망토를 걸치고 예리한 단검을 쥔 로마 군인들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은 좁은 돌길 사이를 빠져나와 높은 담벽을 끼고 있는 바티칸 시국의 정문 앞에 멈추어 섰다.

비교적 이른 오전 시간이었음에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길게 줄 선 사람들은 마치 네게브 사막의 꼬부라진 샛길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입장료는 매우 비싼 편이었는데(2만원 정도) 셈을 잘하는 빌립이 그 곳에 있었더라면 하루에 들어오는 입장료만 해도 족히 몇 십억원은 훨씬 더 넘을 것이라고 계산해 내었을 것이다.

만일 천국문 앞에서 그렇게 비싼 입장료를 받는다면 아마도 제 3세계에 사는 절대 빈곤층의 사람들은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전 세계 카톨릭 교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원천이 바로 이 계산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니 중세기 이후 경제 운용에 남다른 수단을 발휘해 온 교황청의 천재성(?)이 한층 더 돋보여졌다.

세계 문화 유산의 보고 바티칸
바티칸 시국은 하나의 거대한 종교 도시라기 보다는 전 세계의 최고 예술 걸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초대형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오히려 좋을 것이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최고의 예술가들이 때로는 종교적인 열정 때문에, 때로는 교황의 절대적인 압력 때문에 자신들의 예술 혼을 마음껏 불어넣어 인류 최대의 문화유산을 바티칸의 벽이나 마당 위에 뚜렷이 남겨 놓았던 것이다.

국민학교 교과서부터 익숙히 듣고 보아왔던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 라파엘의 아데네 학당과 보르고의 화재,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성 제롤라모, 폼페오 바토니의 성 가족, 죠반니 판니니의 로마의 유적, 코레지오의 다나에, 티찌아노의 사랑, 루벤스의 쌍둥이 형제 등등.

어디 그 뿐인가, 세 부자가 뱀에 감겨 몸부림치는 라오콘, 금방 살아 움직일 듯한 벨베데레의 아폴로, 토르소, 피에타, 모세상 등 일일이 열거하자면 책 한 권의 분량도 다 모자랄 정도이다. 그리고 그림 한 점, 조각 하나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눈물겨운 사연들이 전설처럼 소리없이 담겨져 있다.

어떻게 보면 바티칸 안에 있는 것들은 교황과 성직자 그리고 관광객들을 빼고는 모두가 다 값진 예술품들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무려 190여 톤이 넘는 양의 금과 보석들, 희귀한 대리석과 온갖 장식품들로 바티칸을 지상의 천국 수준으로 꾸밀려고 했으니 면죄부라는 기상천외의 교리까지 만들어야만 했던 카톨릭 성직자들의 고충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 그 순간 하필이면 하늘 높이 세워진 한국교회의 종탑과 화려한 건물들이 눈에 겹치듯이 떠올랐을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버린 이가봇 교회, 그것은 더 이상 거룩한 성소가 아니라 한낱 박물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베드로의 대 광장으로 급히 발 걸음을 옮겼다.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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