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신학의 중요한 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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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는 신학의 중요한 기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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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1.2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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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25)

세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

▲ 백석대 역사신학
60여년 지속되었던 삼위일체신앙에 대한 논쟁은 정통 신학 안에서 둘로 대별할 수 있다. 논쟁사의 전반부에서는 전기 니카아주의자로 알려지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가 중심 역할을 하였고, 후 반부에서는 세 카파도키아 교부들이다.

현대 연구역사에서는 이 둘 사이에 신학의 통합과 일치를 위해 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를 중요한 기점으로 본다.358년에는 앙퀴라의 바실레이오스를 중심으로 니카이아회의 중도파 중 로고스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중도파 내부의 싸움에서, 유사본질신학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앙퀴라의 감독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 중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는 당시 동일본질 신학을 확립하고 논쟁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던 아타나시오스와 서신을 통하여 교류하게 되었다.

유사본질신학 입장에 서 있었던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가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본질이라는 주장 했던 아타시오스와의 대화는 둘 사이에 신학적인 차이가 없음을 받아들여 동일본질 신학으로 일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바실레이오스가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을 위하여 사용했던 휘포스타시스라는 헬라어는 아타나시오스 입장에서 당시 상이본질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아리우스가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바실레이오스의 서신을 통한 해명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 결정에 따라, 아타나시오스는 갈등해결을 위한 노력을 안디옥 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니카이아의 호모우시오스(동이본질)의 보존 아래서, 그리고 성령의 확장 아래서 삼위의 위격의 개념으로써 휘포스타시스의 용어활용’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신학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고, 세 카파도키아인들은 373년에 세상을 떠난 아타나시오스의 신학적인 노력에 이어서 삼위일체신앙고백을 381년 5월에 150여 명의 감독들이 모인 회의에서 논쟁의 마무리로써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을 고백하게 되었다.

바실레이오스는 대략 377년경에 성령피조주창자들과의 논쟁에서 아타나시오스처럼 성령의 동일본질을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동료들 중 다수가 성령의 하나님이심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에 고정시켜지는 것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동료들이 ‘하나의 본질’과 하나님의 ‘세 표명들(위격)’ 사이에 엄격한 구별을 끝까지 주장하였던 바실레이오스의 신학을 좇았다.

이와 같은 신앙고백에 대한 해석은 382년 5월에 다시 열렸던 콘스탄티노플회의 결과를 같은 해 8월에 있는 로마회의에 대표사절들과 함께 보내게 되면서 분명히 들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회의가 있었던 것은 암브로시우스의 교회정치 활동의 결과이었다. 황제들, 테오도시우스 대제와 그라치아누스를 움직여 시도했던 암브로시우스의 제국교회회의의 바램 대신에 이루어지게 되었었다.

382년 콘스탄티노플에 모였던 동쪽지역의 감독들은 이러한 교회회의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회의편지를 보냈는데 이 편지에 381년 회의에서 고백되었던 콘스탄티노플신앙고백의 신학해설을 통한 그들의 삼위일체신앙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 포함되었다. “하나의 본질- 세 위격”이 그것이다. 즉 “삼위일체”를 말한다.논쟁에서 이와 같은 신학의 발전으로 교회사가 하르낙이나 짠은 삼위일체신앙논쟁은 전기 니카이아주의자들에 대한 후기 니카이아주의자들의 신학의 승리라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의 연구 결과는 둘 사이에 신학의 차이가 없음을 동의하게 되었다.
 
성령에 대한 항목이 확대되었던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이 작전상의 이유로 성령의 하나님이심이 아니라 성령의 동일본질의 타협안을 반영하였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이 니카이아신앙고백을 가지고 등급이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던 한 자율의 신앙고백인 콘스탄티노플신앙고백이 고백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삼위일체신앙고백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세 카파도키아인들 즉, 대 바실레이오스(약 330-379)와 그의 친구였던 나찌안쪼스의 그레고리오스(약 329-약390)가 가장 중심에 있었다.

이 두 사람은 362년 제국의 황제가 되는 율리아누스와 함께 아테네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동문수학하였었다. 그리고 바실레이오스의 친 동생인 니쎄의 그레고리오스(약 335-394)가 그 나머지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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