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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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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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1.06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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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47)

우선 예수님처럼 살고 있는 분이 조선일보에 소개된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분의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답변이 “농촌목회요? 그냥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거죠?” 그냥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그냥이란 말을 잘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는 일이 목회이기 때문임을 말하고 싶다.

우리 집사람이 간암수술을 세 번째 했다. 그 다음 검사에 왜 자꾸 생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의사에게 물어보라는 독촉을 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의사와 면담시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물어보았다. 10여 년이 넘도록 만난 담당의사의 딱 한마디 “함께 사는 겁니다”라는 귀중한 답변을 들었다.

만일 나에게 목회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라고. 나는 그냥 대충 사는 사람이다.

한 목사님은 예배당에서 영화상영하고 어르신들에게 컴퓨터 가르치고 미생물을 이용한 농업기술을 강연하고 수목조성과 들꽃축제를 열고 아이들과 야구경기를 보러가고 등하교 버스운전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하는 분은 보령시 천북면 들꽃마당시온교회 김영진 목사다.

들꽃마당시온교회는 들꽃과 나무천지인 평화로운 농촌교회의 담임인 김영진 목사는 이 마을에서 가장 바쁜 목사다. 주민들이 내집처럼 교회에 드나들도록 활력을 불어넣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끊어다가 스크린을 만들고 빔 프로젝트를 사서 영화 상영을 하여 노인부터 동네꼬마까지 예배당 ‘마을극장’으로 모여들게 한다. 그리고 어르신네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치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치고, 동네사람들과 추수한 것을 모아 감사하고, 고기도 굽고, 전도 부치고, 두부도 하고, 송편도 함께 하여 교회마당의 들꽃들의 이름을 배우고, 힘을 합해 들꽃 축제도 열어 보령시에서 살기 좋은 마을만들기 재정도 지원을 받았다.

다른 목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렇게 했다. “농촌목회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그 이유는 도시교회처럼 생각해서 혼자 열심내고 그러면 3년을 못 넘기고 좌절과 실망, 낙담해 떠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농촌에 오면 농촌의 속도로 사는 게 좋습니다” 농촌교회는 주민들과 어울려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제대로 된 역할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언제나 낙심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목회는 의욕이 아니다. 내가 처해진 환경에 흐름을 같이 타야 한다. 종교적 열심을 말할 때에 이슬람 교도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슬람교의 기본원리는 6신(信) 5행(行)이 있다. 즉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행하는 것이다. 6신에는 알라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마호메트가 마지막 선지자이다, 코란만이 성전이다,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재림을 믿는다,심판을 믿는다가 있다. 이슬람교는 기독교를 모방해 창시된 것이다. 5행에는 신앙고백(항상 웅얼거리면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 기도(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금식,구제,성지순례가 있다.

이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방종교의 하나일 뿐이다. 일라라는 신에 맹종할 뿐 그 열심이 결국 이슬람의 극단주의자로 사회를 혼란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오일머니라는 검은 물결의 세계에 깊이 잠입하고 있음은 무서운 사건임을 우리는 이미 안다.

신앙생활이란 열심이란 의미가 아니다. 기독교의 참된 신앙생활이 아방종교와 이단들의 형태로 바뀌는 이유일 수 있다. 목회도 대부분이 열심히 했다고 고백한다. 눈코 뜰 새 없이 힘을 다했다고 말하면서 목회성공을 회상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결과가 현재의 성과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룩해놓은 것이 무슨 보람을 갖게 되는 것인가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열심의 출처가 자기자존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말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말이다.

하나님은 너희들이 하는 그 일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내가 행하는 것을 가만히 보라”는 것인데 왜 나를 앞세워 자기공력으로 인정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열심일 수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이렇게 표현한 분이 있다. “체조경기에서 볼 수 있는 기구 중 높이가 1.2m, 길이가 5m, 너비가 10cm가 되는 평균대가 한 가닥으로 된 좁은 대위를 걸을 때 평행감각과 조정능력을 잃으면 웬만한 선수도 떨어지기가 일쑤입니다. 그 평균대를 20년 가까이 작은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의 철학이 방심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게 목회자”라고 표현했다.

이 불안감이 마치 줄타기를 하는 곡예처럼 생각하는 위험부담을 갖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내가 걷고 있는 목회길에 위험을 느끼게 하는 것이 경쟁의식이다. 그 경쟁은 곧 열심이라는 마귀의 갈채에 마치 곡마당에서 위험부담을 갖고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목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곡예사는 관중 때문에 존재한다. 목회는 대중과 관중에게 보이려는 재주가 아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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