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는 속도보다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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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속도보다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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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3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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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이야기 (46)

마태복음 10장 40절에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니라”고 했다.

목회자가 매일 삶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서 알려지신다면 또 그리스도를 전하는 필수 요소가 우리의 모든 삶이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 되어서 우리 삶의 체험담이 예수님을 나타내는 하나의 비유가 될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삶에 가치를 두어서 그 체험에서 나타나는 행위에 대한 말을 했다.

이미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심에 대한 나타나는 현상을 나누는 것이 목회인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이 아니라는 것을 로마서 10장 1절부터 말하고 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다.

예수님처럼 하는 목회는 속도보다는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방향이 예수님이면 너무 쉽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걸어가신 아는 길이기 때문에 모험이나 두려움이 없는 길이다. 또한 신비로울 수도 없다.

우리가 하려는 목회성장학이라는 열심의 조건이 순수하고 쉬운 길을 복잡하게 어질러 놓는 일이 된다. 이미 갔던 길을 왜 일부러 꼬불꼬불한 골짜기를 만드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열심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있다. 유대인과 한국인의 비슷한 점은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 열심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는가하면 과잉충성, 열정, 정열이 사탄의 박수갈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목회성공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가? 결국 교회가 아닌 교회당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 열심이란 출처가 어디인가? 자기중심이라는 사실이다. 말이 훌륭하고 유창하여 하나님 중심인 것 같으나 일방적인 자기목표인 것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의 세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꿈꾸고 있는 환상적 환경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열심을 자동차 엔진에 비교한 사람이 있다. 자동차엔진이 움직이는 것이 열심인가? 분명히 아니다. 그냥 엔진으로써의 일일 뿐이다. 베드로의 누가복음 5장 4절에서 나타난 사건이 열심인가? 밤을 맞도록 그물을 던진 것은 열심이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진 것은 열심이 아니다. 베드로의 지금까지의 일은 자기란 조건에 의한 열심이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했다. 이 열심은 무엇인가? 어거스틴은 “바른 길에서 절뚝거리는 것이 잘못된 길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이단일수록 열심을 강요한다. 이단 뿐 아니라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목표보다는 속도전인 열심을 강요한다. 중요한 것은 목표에 의한 삶 자체를 바로 알지 못하는데 있다. 열심은 욕망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없다는 불안 초조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행동일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재촉할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수님이 움직이시는 대로 따름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다. 속도조절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란 자신의 약점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거움이다.

예수님처럼 목회는 속도가 아니다. 자기 몸을 희생하는 봉사가 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도 없고, 대속의 피도 없고, 십자가의 능력도 없다면 결국 십자가를 부인하는 그릇된 삶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것이 희생이 아니다. 우리가 잘 사용하는 것이 사랑이란 말과 희생하라는 말이다. 이 말 다음에 봉사생활인데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를 희생해야 된다고 목사들은 말한다. 사실상 목사 자신도 무엇을 얼마큼 희생했는가 생각해보면 희생보다는 나를 중심한 조건에 의한 일을 하고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목사가 희생을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희생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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