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구속의 드라마 현장 데살로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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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구속의 드라마 현장 데살로니가
  • 승인 2002.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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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에 실크 로드(비단길)가 있었다면, 로마 제국에는 에그나티아, 압비아 로드가 있었다. 전자가 낙타 위에 온갖 물품들을 싣고 다니던 황토빛 사막길이었다면, 후자는 말이 끄는 전차 위에 무기와 군사들을 싣고 전쟁터로 달려나가던 단단한 화강암 길이었다.

로마는 이 길을 통해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한데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곳곳마다 황금 독수리가 새겨진 붉은 깃발을 꽂아 놓았다. 그러나 전 세계로 이어졌던 로마의 길은 그 앞을 강력하게 막아선 저항 세력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훼파되었고 후에는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힌 늑대와 들개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울 일행과 복음 전도자들은 이 로마 제국의 군사 도로를 통해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땅끝까지 성공적으로 전파할 수 있었다. 세계 역사는 이 복음 전도의 길을 막아 보려고 했던 사라센의 종교나 회교도의 전사들의 시도가 모두 다 한결같이 실패했었음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그렇게 역설적으로 역사 위에 펼쳐져간 위대한 구속의 드라마는, 막강한 로마의 힘이 움켜쥐지 못했고 헬라의 철학이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오직 계시 종교인 기독교만이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음을 만 천하에 입증해 보여주었다.

빌립보에서 떠난 바울 일행이 에그나티아 도로를 따라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로 갔었던 것처럼(행17:1), 우리 일행도 이 길을 따라 바울의 선교여정을 함께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맨 처음 들른 곳은 암비볼리(현재의 지명은 Neochori)였는데, 이곳은 지중해안으로부터 5km떨어진 스트리몬(지금의 Struma) 강 동편 기슭에 위치한 상업도시였다.

이 성읍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사도 바울은 단지 이곳을 지나쳐 갔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대로 지나쳐 가기로 했다. 주전 4세기에 세워졌다는 거대한 사자상이 마을 입구에서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듯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사도 바울 일행도 저 사자상을 보았었겠지,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흐르는 세월이 겹겹으로 주름잡아 놓은 침묵의 나이테는 생각보다 더욱 두껍고 무거웠다. 그 다음 찾아간 곳은 아볼로니아,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옛 도시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허름한 마을 근처에 있는 큰 고목 나무와 그 밑에 있는 넓은 바위가 이곳이 결코 예사스럽지 않은 어떤 장소임을 직감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바위 밑에는 헬라어와 영어로 새겨진 화강암 푯말이 있는데, 거기에는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설교하였다”는 문구가 있었다. 아마도 바울이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설교했던 바위를 기념하는 곳인 듯 하다. 어디 바울이 설교했던 곳이 이 바위 한 곳 뿐이었을까? 그가 발을 딛는 곳은 어디든지 예배 처소가 되었고 외치는 곳은 설교 단상이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곳들은 오늘날 성지가 되어 순례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고 있으니, 바울의 발자취가 유럽의 지도를 새로 그리게 만들었다는 말은 결코 과장된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하늘 한복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듯 서있을 무렵 우리 일행을 태운 리무진 버스는 어느 떠들썩한 해안가 근처 식당에 멈추어 섰다.

그리스의 전통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난 후 우리들은 5분 여를 걸어 하얀 모래들로 뒤덮힌 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저 멀리 에게 해에서는 바다 물결을 타고 태초의 원음이 들려오는 듯 했고 바람결에 실려온 상긋한 바닷내음은 어릴 때 서귀포 자구리 바다에서 찡하게 맡았던 바로 그 이상한 냄새임이 틀림없었다.

푸르다 못해 짙은 검은 빛깔이 나는 지중해 바다는 굳이 헬라 시인들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더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어쩌면 더위에 지치고 땀으로 얼룩진 복음 전도자들이 지나가는 행로에 이 검푸른 바닷물에서 더운 몸을 식혔을 것을 상상하니 서서히 밀려드는 잔물결이 더욱더 다정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제 물을 만난 물개처럼 정신없이 첨벙거리며 헤엄치다가 문득 저 아득히 먼 지평선 위에 신기루처럼 떠있는 터키 해안으로 이대로 손발을 휘저으며 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다.

잠시 어지러워졌던 마음을 추스리며 물에서 나와 젖은 몸을 말리면서 그날의 마지막 여정인 데살로니가를 향해 10분 여를 달려갔다. 데살로니가(지금은 Thessaloniki)는 옛 마게도냐의 중요 수도였고, 현재는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구 약 1백 만명)이다.

동 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풀과 서 로마 수도 로마를 잇는 에그나티아 도로를 다른 여러 도시들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키케로(Cicero)는 “데살로니가는 우리 영토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데살로니가를 찾아왔던 것은 제2차 전도 여행시 빌립보에서 쫓겨난 직후였다(행17:1). 어쩌면 그가 로마의 먼 동쪽에 위치한 데살로니가로 곧장 달려왔던 것은 이곳을 주요 거점으로 삼아 아름다운 복된 소식(유앙겔리온)을 전 세계 땅끝까지 전해보려고 하는 거룩한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을 그들의 영역에서 멀리 쫓아버리거나 아예 죽여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 때 로란드 부인은 “오 자유여! 그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행해지고 있는 줄을 아는가”라고 외쳤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이 소중한 자유를 진리를 말살하고 생명을 죽이는 무서운 악의 도구를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상 유대인들이 주장했던 대로 바울 일행은 어떤 의미에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는 자들이었다(행17:6-7). 그들이 예수의 복음을 들고 가는 곳에는 거센 변화의 바람이 불었고 겉잡을 수 없는 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지금 데살로니가에는 바울의 선교활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이렇다할 유적들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파사 전쟁에서 승리한 것(A.D. 303)을 기념하여 세웠다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데오도시오스 때(A.D. 379) 성채 주위를 둘러쌓았다는 벽, 순교자 데메트리우스(A.D. 4세기)를 기념하여 지었다는 교회 등이 주변에 세워진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서 초라한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청부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야손과 몇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읍장들 앞에 세웠었다. 그날 우리 일행은 데살로니가 시내를 활보하며 걸어다녔지만 그 누구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거나 끌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씁쓸하고 서운하게 느껴지는 것은 선배 전도자들의 순교적인 삶을 남몰래 부러워하는 나만의 감상적인 느낌 때문이었을까.

고영민목사(천안대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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