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한 ‘선교의 약속’ 나이 60에야 지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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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한 ‘선교의 약속’ 나이 60에야 지켰죠”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2.09.21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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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 기간 태국 교환교수로 단기선교에 나선 백석대 오필환 교수

 

태국 교환교수 사역 중 치앙마이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 백석대 오필환 교수.

천로역정의 최초 번역자 오천영 목사의 손주로 3대째 신앙의 가정서 자라
9개월의 짧은 태국사역 교수로 가르치고, 고산족 선교로 섬겨
한류 열풍 안고 엘리트층 불러들이는 선교 시급 ‘한국어교육원’ 등 세워야

군인으로 사는 것이 천직인줄 알았다. 그런 그가 교수가 됐고, 이어 목사가 됐다. 그리고 환갑의 늦은 나이에 선교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 지금이 그에겐 천국이다.

# 하나님의 음성이 바꿔 놓은 삶

백석대 행정학 오필환 교수. 전투기 조종사였던 그의 삶은 지금 180도 변해있다.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파일럿으로 하늘을 날았고, 다시 교수요원으로 발탁돼 서울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공군사관학교 교수로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28년이라는 긴 시간, 그의 인생 절반이 그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이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소박한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내뱉은 겁 없는 ‘서원’을 실천하는 중이다.

천로역정의 번역자로 알려진 오천영 목사의 손주인 오필환 교수는 3대째 이어진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오천영 목사는 ‘천로역정’을 번역한 최초의 한국인이었고, ‘신약의 부녀들’ 등 각종 서적을 번역하며 문서선교사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가정이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목회하던 큰할아버지는 6.25때 교회를 지키다 순교했다. 아버지 역시 교육계에서 일하시다 뒤늦게 목회의 길에 들어갔다. 그의 형도 목회자였다. 모든 이가 아무 의심없이 하나님을 믿었고, 목회자로 섬기며 복음을 전했다. 그 속에 오필환 교수도 있었다.

“목사님 자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냥 믿으라니까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믿었죠. 그런데 문제는 체험이 없다는 거예요. 저 역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죠. 그러다가 미국 유학길에서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늦은 나이에 시작한 미국 유학은 쉽지 않았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이어졌다. 성경공부를 하며 말씀을 묵상했다. 그 속에서 길을 찾고 싶었다. 그 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 ‘내가 너를 사랑한다.’ 평소에 들을 수 없었던 주님의 음성이었다. 그 순간 오 교수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깨달았다. 시편 23편의 말씀이 새롭게 와 닿았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두려웠지만 하나님은 늘 그의 곁에 계셨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전하게 보호해주셨다. 오 교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세밀한 음성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 태국, 늦은 선교에 나서다

뜨거웠던 믿음 속에서 오필환 교수는 ‘선교’의 길을 약속했다. 누가 선교에 나설 것인가 하는 질문에 남들을 따라 번쩍 손을 들었다. 결심도 그 때 뿐. 목회를 안 하겠다고 도망다니고, 평신도 사역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다.

오필환 교수가 목사가 된 것은 형의 죽음 때문이었다. 천안 백석대학교회를 담임하던 오진환 목사가 그의 형이다. 오 목사가 지병으로 일찍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고민하던 동생은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공군사관학교를 떠나 백석대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은 늘 허전했다. 하나님과 약속한 선교의 서원이 자꾸 떠올랐다.

결국 안식년을 맞이한 오 교수는 선교에 나섰다. 태국 치앙마이대학 교환교수를 자원했고 그것은 선교사역의 첫 시작이었다. 치앙마이대학에 외국인 교환교수는 그가 처음이었다. 정치행정대학에서 그는 9시간씩 강의했다. 치앙마이대학교는 불교의 나라 태국에 세워진 왕립대학교였다. 학교 안에 커다란 절이 있고, 뒤뜰에는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오픈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친밀감이 깊어지자 태국인들은 오 교수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스럼없이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 하고 나누는 기회가 생겼다.

자신감이 생긴 오필환 교수는 수업 중간 중간 ‘천지창조’를 이야기 하고, 하나님을 전했다. 불교신자인 그들에겐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 한류 열풍으로 한국어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에게 한국어 강의도 진행하며 성경을 자원으로 활용했다. 작은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주말에는 고산족을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 감리교 선교센터와 함께 고산족 리더십 트레이닝 협력사역을 전개했다. 고산족은 국경을 넘어온 일종의 피난민으로 태국 시민권도 없고 토지도 소유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싱가폴 의사들의 의료선교에도 동역했다.

치앙마이에서 두 시간 떨어진 치앙라이 가나안농군학교 예배도 인도했다. 이곳에서 한국어도 가르쳤다. 오 교수는 3개월이면 한글을 읽는 태국 아이들의 모습에서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에 다시금 감탄했다. 그리고 한글과 한국어는 훌륭한 선교의 도구라고 확신했다.

“9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태국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태국의 기독교인구는 2%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0.2%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170년 선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복음화율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전도가 힘들다는 것을 의미하죠. 하지만 길이 없지는 않습니다. 고산족 중심으로 전개하는 선교를 상류 엘리트층으로 선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실제 태국선교의 대부분은 고산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힘은 왕족과 상류층 일부.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를 운영하는 태국의 정치 문화적 상황을 볼 때 상류층을 공략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 오 교수의 견해다.

이러한 생각은 교환교육으로 발전했고, 지난 6월 백석대학교와 태국 칭아마이대학교가 교육협력 MOU를 체결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태국 엘리트 학생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한국어를 가르치고, 복음을 전한다면 그들을 선교사로 역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생 뿐 아니라 태국 교수도 초청해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독교대학에서 교환교육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선교에 동참하고, 안식년을 맞은 교수나 학생들을 태국에 보내 세계의 문화를 배우는 기회를 많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글로벌 리더’로서의 대학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틈틈히 고산족 선교에 나선 오필환 교수는 자비를 털어 영어식 발음 표기가 된 성경과 찬송을 선물했다.

#불러들이는 선교가 필요하다

오필환 교수의 이 같은 계획은 태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동경하는 캄보디아, 베트남 어느 곳이나 가능하다. 한 사람의 엘리트를 데려와 믿음으로 변화시킨다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것으로고 오 교수는 믿고 있다. 특히 백석대학교에 ‘한국어 언어교육원’을 세워 해외선교지 학생들을 더 많이 불러오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가는 선교도 중요하지만 이젠 불러들이는 선교를 고민해봐야 할 때죠. 백석총회와 백석대학이 이러한 일을 감당해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태국선교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털어 놓은 오필환 교수는 사실 9개월의 짧은 경험이 못내 아쉽다. 오랫동안 사역을 한 선교사들이 보면 “틀렸다” 할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경험도 한 알의 밀알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불만 지피고 온 것 같아 저도 아쉽습니다. 선교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체험했고요. 그렇지만 작은 경험을 나누면 그것이 모여 큰 결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과 학기가 다른 태국에서 떠나는 오 교수에게 방학 때마다 특강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다음에는 치앙마이대학에 성경공부 그룹을 만들고 올 생각이에요.”

오필환 교수는 각자 가진 재능을 썩히지 말고 선교 현장에 나눠주고 오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태권도, 영어, 교육 등등 재능 하나하나가 선교지에서는 소중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정년까지 남은 5년 동안 파트타임 선교사역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평생을 가르치는 일로 살아왔고, 그 재능을 선교지에 모두 풀어놓고 싶다.

“우리 학교 교수님들이나 교단 목회자, 재능있는 평신도들이 안식년에는 꼭 선교지로 나가길 기도합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세상 곳곳에 많더군요. 학교와 교단차원에서 선교 루트를 개발하고 연결해서 전문적인 사역이 일어나갈 바랍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한 영혼의 변화를 위해 작은 씨앗만 뿌리고 오면 되지 않을까요?”

내겐 공군으로의 삶이 전부라고 믿었던 오필환 교수.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의 길은 하나님의 예비하심 속에서 한 걸음씩 달라져왔다. ‘내 인생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늘 그의 삶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 교수는 ‘순종’하기로 했다. 사람의 믿음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사실이 그의 두려움을 모두 가져가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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